세계지리답사: 78개의 글

사우디아라비아 물자원과 담수화

Posted by 지오VR
2018.10.09 15:23 세계지리답사/사우디아라비아

 

<사진을 클릭하면 360 vr 파노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34년전, 19832, 사우디아라비아를 갔었다. 당시 해외는 공무원이나 기업의 공무나 출장이 아니면 거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청소년이 양국을 상호 방문하는 교류학생의 일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콜레라 예방접종, 자유총연맹의 반공소양교육을 받고 단수여권을 받았다. 출국하는 날은 설날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부, 중부, 서부의 대표적인 도시, 다란, 주바일, 리야드, 제다, 타이프(?)등을 방문하였다. 다란과 주바일은 울산, 리야드는 서울, 제다는 인천을 연상하면 도시의 위치와 특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건설 중인 산업항과 주택공사 현장, 해수 담수화 공장, 킹 사우드 대학, 공원, 문화공연장, 농장, 향수냄새 가득한 시장 골목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제다의 한 공원에서 일부다처제의 가족을 촬영하다 걸린 사건, 기도시간이 되자 문을 닫는 모든 가게, ‘싸게 팝니다란 문구가 걸린 가게와 한국 건설노동자, 우리와 다른 문화로 인해 겪은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은 리야드 주변의 한 농장과 주바일의 담수화 공장 이야기이다. 그 당시 기록한 메모와 보고서를 잃어버려 너무 아쉽다.

 

주바일에 있는 해수 담수화 공장을 견학했다. 우리나라 기업이 서독기업과 컴소시엄으로 토목, 담수시설 분야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 기업이 독자적으로 수주를 받아낼 것이라는 자신감을 나타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 기업이 해수 담수화사업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사우디는 대표적인 물 부족 국가이다. 사우디 인구는 현재(2018) 3,355만 명으로 물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하천이나 호수도 거의 없는 사우디는 강수량도 매우 적어 물 부족 현상은 악화되고 있다. 사우디 정부가 현재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해수 담수화' 이다. 국내 오일 사용량의 절반 이상이 담수화 처리에 이용되고 있어 국가 재정기반을 위협할 정도라 한다.

주바일 담수화 공장의 생산량은 전 세계 담수화 생산량의 17%에 이른다. 이 물은 320길이의 파이프를 지나 수도 리야드의 가정집으로 배달된다. 사우디는 이처럼 식수와 생활용수 대부분을 담수에 의존하고 있다. 사우디의 음용수 점유율은 담수가 50%, 지표수 10%, 지하수 40%로 파악되고 있다.

 

"Riyadh""정원"을 의미하며 이는 오아시스 마을로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리야드는 612m 고원에 위치하며 봄철에 약간의 강수량이 있는 건조 사막기후이다. 리야드 주변에 오아시스를 활용한 농장이 있었다. 야자나무와 샘, 낙타를 연상하며 찾은 오아시스는 아주 큰 물 웅덩이였다. 상당한 깊이가 느껴지는 곳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장 밖으로 아리랑 농장이란 간판도 스쳐지나간다. 한참을 달려 차에서 내리자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푸른 초원이 나타났다. 사막에서 젖소와 거대한 스프링클러를 보았다.

 

스프링클러의 길이가 반경 500미터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넓은 목초지에 물은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질문에 지하수와 오아시스를 끌어다 사용한다고 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농경에 사용한 엄청난 물자원으로 지하수 고갈 위기 직면에 처하자 사우디는 해수 담수화로 얻어진 물을 국내 농경산업 발전을 위해 적극 지원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농작물 수확량의 증가와 저렴한 농작물 공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물부족 현상으로 사우디 정부는 2016년부터 밀 생산을 중단하고 수입하고 있다. 사우디정부는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저가의 물 공급을 하고 있다. 리야드 지역에 농업용수 및 식수확보를 위해 댐이 건설되었으나, 강수량 부족으로 실질적으로는 홍수방지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담수 수송관계로 인한 과다 비용 발생, 담수 재처리와 하수도 처리율이 매우 낮아 환경파괴 발생, 담수화 시설의 노후화, 고갈되어가는 석유자원, 급격한 인구의 증가, 물 소비량의 증가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인심 좋은 물 공급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사우디아라비아의 장밋빛 미래 계획은 계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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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주 빅아일랜드 칼라파나

Posted by 지오VR
2018.02.16 11:31 세계지리답사/미국


    사진을 클릭하면 360도 vr파노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칼라파나에서 내가 본 용암의 표면은 유리질과 같이 반짝이고 매끄러웠다.

    용암의 새끼줄 구조를 보았다.

    용암표면이 들어올려져 부풀어져 있었다.

    파호이호이(Pahoehoe)용암이다.

     

    용암의 겉과 속의 서로 다른 냉각속도와 이에 따른 흐름의 차이로 인해 새끼줄 구조가 만들어진다.

    또한 공기와 접하여 굳어진 용암의 표면과 달리 여전히 뜨거운 용암이 계속 공급되면 용암 표면부가 들어올려져 부풀어지는 현상도 생긴다.

    ......

      

    하와이에서 무슨일이?

    도착하기 몇일 전 하와이주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하와이가 탄도미사일 위협에 처했다. 즉각 대피하라, 훈련이 아니다’라는 경보가 휴대전화를 통해 발령됐기 때문이다.

    경보 오류로 판명났지만 상상 이상의 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화산국립공원 가는 날, 바로 그 날 셧다운이 발표되었다.

    국립공원이 폐쇄되었다. 갈 수 없었다.

    대안으로 찾은 곳은 칼라파나 마을,

    그리고 이틀 뒤 셧다운은 해제되었다.

    ...

    헬기투어 하는 날, 용암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헬기를 타기 위해 교육도 받았고,

    좌석배치가 까지 끝나고 헬기장 앞까지 왔는데,

    기상이 좋지 않아 취소란다.

    결국 붉은 용암은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싸늘하게 식어 있는 용암대지 칼라파나는 붉은 용암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있었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엄숙하고 숙연한 엄청난 장관이었다. 용암이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덮었다.

     

    하와이 마지막 날 밤, 어텐션 어텐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고 비상계단을 이용해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믿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복도에 가득했다.
    비상 계단은 호텔 투숙객으로 꽉 차서 내려갈 수 없었다...
    소방차가 밑에 왔다는 등 말만 떠돌더니 더 이상 안내 방송이 없다.
    오작동은 아닌 듯 한데...
    웅성 웅성...
    하나 둘 다시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 하와이 모든 VR 파노라마는 장비 없이 손각대로 촬영되었음. 첫번째 VR은 당시 뉴스영상이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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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석굴 사원

Posted by 지오VR
2016.02.07 15:18 세계지리답사/인도

 

사진 클릭하시면 엘로라 석굴 사원 360도 VR파노라마 투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정을 바꿔 아우랑가바드를 가기전에 엘로라 석굴을 가기로 했다. 엘로라 석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였던 지라, 몇 번 석굴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오래만에 지식 확인 압박에서 벗어나게되니 느낌의 영혼이 마음껏 춤을 추었다.

경주 석굴암과 중국의 돈황 석굴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불교석굴로 알았던 나에게 엘로라 석굴 사원의 규모와 섬세함 모든 면에서 충격이었다.

 

데칸 고원의 현무암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려가면서 만들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카일라쉬란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의 거처로 여겨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사실 카일라쉬 산은 티벳에 있기 때문에 중부 인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크리슈나 1세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엘로라에 그 이름을 본뜬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보통 불교에서 수미산이라 부르는 산이 카일리쉬 산이라고 한다. 이 사원은 라슈뜨라꾸따 왕조의 크리슈나 1세(krishna, 757-783)에 의해 깊이 86m 너비 45m 높이 35m의 규모로 지어졌다. 150년에 걸쳐 7천여 석공들이 동원, 거대한 바위 위에서부터 아래로 쪼아내려 갔다. 제거된 돌의 무게만 20만 톤에 이른다.

 

어떤 이는 말한다. 돌을 깍아 내는 것이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라고... (설계에 의거하여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내고 현지까지 운반하여, 그것들을 조각한 뒤에 헝크러짐 없이 쌓아 올려 건물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고도의 기술과 비용이 필요) 하지만, 여기에 동원된 사람을 상상하고 싶다.

 

중국 석굴 사원의 사암, 석굴암의 화강암, 엘로라의 현무암...

 

인도에서 불교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34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석굴이 서로 고의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없이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34개의 석굴이 2킬로미터를 넘게 늘어서 있는데, 제1∼12굴이 불교 석굴, 제13∼29굴이 힌두 석굴, 제30∼34굴이 자이나 석굴로서 3종교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이들은 시대적으로는 불교 석굴이 7∼8세기, 힌두 석굴이 7∼9세기 그리고 자이나 석굴이 8∼10세기에 만들어졌다. 가장 늦은 시대의 자이나 석굴의 내부공간은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며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밀도가 높은 공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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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라두르가 요새

Posted by 지오VR
2016.01.31 19:52 세계지리답사/인도

치트라두르가 요새(Fort Chitradurga)


함피(Hampi)에 더 오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벨루르의 유적을 보기위해 하산으로 이동 중에

치트라두르가에서 만난 화강암...

굵은 바위 언덕과 요새...

이러한 암석만 보면

항상 떠오르는 곳이 있다.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눈으로만 볼 수 밖에 없었던 곳,

사진 촬영도 금지된 곳,

정신줄 놓은 곳,

 

그 곳은

동해쪽 금강산 가는 길,

해금강이라고 해야하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석호인 감호를 막 지나면

온통 바위산이 나타난다.

선녀와 나뭇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산,

구선봉이라 했던가?

금강산 1만2천봉 중 마지막 봉우리라 했던가?

바위산 사이로 난 길 양쪽으로 펼쳐진 그 모습...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았다.

잊을 수 없는 곳이다.

...........

.......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않고,바위 정상에 있는 요새에 오르고 싶어 먼저 나아갔지만,

궁전 부근에 도착해서 바위를 보니 엄청 가파르다.

현지인들은 바위에 파인 홈을 밟고 가볍게 오른다.

이 곳으로 오르면 어디로 내려오냐는 질문에 정상에서 다른 길로 내려간단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는데, 욕심을 부렸다.일단 올라본다.

하나 둘.. 오를만 하다.그런데 그것도 잠시, 아래를 내려본 순간 아찔하다.

이제 3분의1 올라왔는데, 어찌할까 망설였다.

내려가자니 위험하고 올라가자니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무섭고...진퇴양난이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결심했는데, 옆에 있던 인도인이 손으로 끽~ 한다.

언젠가 누군가 내려가다 미끄러져 죽었다는 것인지?

위험하니까 내려가지 말라는 말인지?


이런... 한참을 서있었다

.......

그 와중에도 vr촬영하고, 등뒤로 바위를 두고 한발 한발...

식은 땀나게 내려오자, 아래쪽에서 기다리던 인도인사진찍자고 한다...

 

 


↑ 사진 클릭하면 요새에 오르는 암벽을 360도 VR파노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관련자료 찾다보니

치트라두르가에 멍키의 왕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

청년 조티 라즈, 안전보조장비 없이 맨손으로 치트라두르가 요새에 있는 성벽과 바위를 오른단다.

18살 때 벽을 오르는 원숭이를 본 이후 벽오르기 연습을 해왔다는 조티 라즈,

요새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벽을 오른다고 한다. 유튜브로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이날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흔적은 우연히 촬영한 사진 속에 성벽위 하얀 자국으로 남아있다.

 

 

<사진제공 수현 샘>


치트라두르가는 비자야나가라 왕조의 영주 나야카스의 수도,

위키백과 영어 문장 해석 번역기를 돌려보니 내용이 뒤죽박죽이다.어휴....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다...


Madakari Nayaka의 통치기간 동안 치트라두르가는 하이더 알리의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바위의 구멍을 통해서 치트라두르가 요새에 들어가는 여성을 우연히 목격하고

구멍을 통해 자신의 병사를 보내는 하이더 알리의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그 구멍을 지키는 병사는 점심을 먹기위해 집에 가야만했습니다.

경비병의 아내 Obavva는 물을 구하기 위해 구멍을 지나다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적군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Obavva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Onake(곡물을 두드리는 긴 나무막대)를 들고있었습니다.

그녀는 구멍을 통해 들어오려는 하이더 알리 군인을 하나씩 하나씩 죽였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죽어갔습니다.

단기간에 병사 수백명이 들어왔고 의심의 여지없이 죽어갔습니다.


점심먹고 돌아온 그의 남편은 피뭍은 Onake를 들고 있는 그녀와 그녀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적의 수백의 시체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함께 적과 싸웁니다. 두사람에 의해 하이더 알리의 모든 군인들이 죽어갈 무렵 아내 Obavva는 죽습니다.


바위 구멍은 아직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증표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그녀의 용감한 시도가 요새를 구했지만

Madakari Nayaka이 계속되는 전투에서는 1779 년 하이더 알리의 공격을 격퇴하지 못하고 점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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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VR 파노라마 투어

Posted by 지오VR
2016.01.28 19:37 세계지리답사/인도



360도 VR 파노라마 투어... 사진을 클릭하세요

 

아잔타 석굴  

 

데칸 고원의 중심 아우랑가바드에서 북으로 약 100km, 차로 1시간 30분

일출을 차에서 맞이하며 아잔타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이동, 또 걸어서 표검사하는 곳에 도착하니 아직 개장하지 않았다.

1등 손님이다.

사진에서 본 초승달 모양의 계곡과 절벽 여기저기 구멍난 모습이 반갑다.

아침 햇살이 등뒤에서 비춘다.

석굴입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지만, 시원하게 느껴지는 발바닥의 촉감이 상쾌하다.

......


1번 석굴... 벽화..

아잔타 석굴의 명성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벽화때문이라한다. 

그 벽화를 볼 수 있는 석굴이 1,2,4,16,17번 석굴이다.

벽화를 그린 이유는 불법을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함이라 들은 것 같다.

익숙하고 친숙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연화수 보살'

일본 호류사의 금당벽화?

얼굴방향만 다르지 목걸이와 머리모양... 많이 닮았다.

고대 인도의 뛰어난 불교 미술 수준을 가늠케 하는 벽화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옷과 액세서리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 돈황 석굴과 여러 석굴을 가보았지만,

감흥이 다르다.


연화수 보살



2번 석굴...

1번 석굴에 비해 다소 작기는 하지만 조성시기는 약간 빠른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부처님의 일생을 담은 벽화와 천불화현 변화, 황금거위로 태어났던 부처의 전생 이야기,......

천정엔 원형 및 기히학적 무늬의 문양, 만다라가 그려져 있다.

 

10번 석굴

아잔타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며 1891년 발견될 때 10번 석굴이었다.

차이티야 양식이다.

석굴암 처럼 천정을 돔의 형태로 만든 석굴을 말한다.

9,10,19,26,29번 석굴이 이에 해당한다.

불교의 석굴사원은, 예배의 장소로 하는 차이티야(Chaitya)굴)과 승려들이 사는 비하라굴로 분류된다.

39개의 팔각형 석주와 좌우 벽에는 벽화가 훼손된 채 그려져 있다.

 

10번 석굴 돔형 천정


17번 석굴

서기 450년대에 조성된 석굴, 아잔타 석굴 벽화의 백미, 최상의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8개의 부처 전생담과 자타카와 부처님 당대의 사건 등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벽화 석굴

 

 

석가모니 사촌동생인 데바닷타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아잣타사트루왕과 공모하여 술취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시해하려고 했던 사건이 묘사되어있다. 

 

 

19번 석굴

대승불교 시대 차이티야 양식, 줄무늬 돔과 각양각색의 조각상

 

26번 석굴

아잔타 석굴에 유일하게 석가모니 열반상이 있다.

입구로 들어와 왼쪽 벽면 기둥 뒤로 머리를 입구쪽으로 다리를 내부쪽으로 누워있다.

가운데는 스투파와 불상이 같이 조각된 아잔타에서는 가장 후대에 조각 양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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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시기리야 록

Posted by 지오VR
2016.01.25 01:45 세계지리답사/스리랑카



시기리야 록 사진클릭 360도 VR파노라마 감상(10개)하세요


시기리야는 사자의 언덕, 혹은 사자의 목구멍이란 의미입니다.

사자의 언덕은 인도어에서 전래된 말로 '싱하' 사자와 '기리아' 언덕의 합성어입니다.

사자의 목구멍은 스리랑카 싱할리어에서 유래된 말로 사자를 뜻하는 '싱하'와 목구멍을 뜻하는 '기리'의 합성어 입니다.

정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바위는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Sigiriya 전설

서기 5세기경 스리랑카는 '다투세나'라는 위인이 출현하여 싱할라 왕조를 계승합니다. 

그에겐 두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부인은 왕이 되기전 얻은 부인으로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었고 '카사파'왕자를 낳았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왕이 된 후 얻은 왕족 출신의 부인으로 '목갈라냐' 왕자를 얻습니다.

형'카사파'는 호전적이고 성격이 급했고, 동생 '목갈라냐'는 논리적이고 차분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다투세나왕이 노쇠해 지자 왕위 계승을 동생 '목갈라냐에게 하려고하자, 형'카사파'는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범합니다. 동생은 이 사실을 알고 바다 건너 남인도로 탈출합니다. 왕이 된 형은 심각한 정신 분열에 시달기고 불안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고, 한 시도 마음 놓고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 정신 이상자였습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을 지으려고 작심합니다.


오랜 세월 승려들의 수련장으로 쓰고 있던 정글 한가운데 바위산 위에 승려들을 쫒아내고 왕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해자를 만들고 악어를 키우고, 바위산 곳곳에 돌 기뢰를 설치하고, 수영장과 연회장을 갖춘 화려한 궁전을 세웁니다.

코끼리를 이용한 승강기를 만들고, 압력차를 이용한 대나무 파이프로 정상까지 물을 끌어 올렸다고 합니다.


어느덧 14년이 흐르고, 남인도 도망간 동생이 스리랑카로 쳐들어옵니다.

동생은 장기전을 대비해 시기리아성으로 오르는 모든 급수를 차단합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된 형 카사파는 성을 내려와 코끼리를 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지만 결국 동생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 후 아누라다푸라로 수도를 환도히키고 시기리야는 스님들의 수련장으로 돌려줍니다.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시기리아는 1898년 영국 장교에 의해 발견됩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사자의 얼굴 입구 상상도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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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피 헤마쿠타 힐에서 바라본 비루팍샤 사원...

Posted by 지오VR
2016.01.22 21:00 세계지리답사/인도

 

Hemakuta Hill에서 바라본 비루팍샤 사원 < 위 사진을 클릭하면 360도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남인도 답사 여행중 가장 특이하고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보니 함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북인도 이슬람왕조가 남인도를 위협하게 되자, 남인도 힌두 왕조들이 결속하여 14세기(1336년)에 비자야나가르에 왕조을 건설하고, 

위치상의 이점을 살려  향신료와 면제품의 상권을 장악하여 남인도 최대의 제국으로 급성장하다, 

16세기(1556년) 북쪽에서 침입한 회교도(이슬람교) 세력들에게 몰락한 비자야나가르  힌두 왕조가 있었던 곳이 함피이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100만명의 용병을 고용하고, 50만명의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며, 

집들은 우아한 장식이 달린 발코니를 갖추었고, 궁전은 호화롭다고 했다. 

또한 교역으로 바자르거리엔 수많은 사람들과 외국에서 온 상인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비루팍샤 사원 왼쪽으로 돌아 언덕을 오르니 헤마쿠타 힐,

언덕에 오르니 비루팍샤 사원을 중심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위산과 사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자야나가르 힌두 왕조의 폐허 유적들은 매일 뜨고 지는 해와 함께 수많은 여행자를 이곳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수 많은 암석들은 화강암 덩어리...

땅속에서 올라오던 마그마가 식어 굳어 만들어진 것이 화강암,

어떻게 지표에 나오게 되었을까?

화강암 위에 쌓여있던 지표면이 깍여나가면서 화강암이 솟아올랐다.

1년에 0.1mm 깍여나간다면 1억 년이 지나면 10km가 되듯이...

 

그런데 하나의 큰 덩어리가 아닌 것은 왜일까?

지표에 가까와 질 수록 압력이 낮아지고, 이제 화강암은 절리와 균열이 발생...

결빙, 식물뿌리의 침입등으로 서서히 부서진다.

 

 

 

바위산이라 사람살기 힘들 것 같지만

화강암 풍화토와 깨끗하게 정화된 풍부한 물로 인해

사람들이 논농사도 짓고 야자수, 바나나 등을 재배하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또한 함피에서 가까운 곳에 대형 댐이 건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물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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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수도 티라나

Posted by 지오VR
2015.09.13 14:30 세계지리답사/알바니아

 

<사진 클릭하시면 360도 VR Panorama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침 식사시간 전 잠깐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중앙대로를 산책하였다. 호텔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타이완 광장, 이글루 모양의 벙커, 그리고 호자의 딸이 지었다는 피라미드 건물, 너무 한적한 대통령궁, 마더 테레사 광장, 알바니아 정치대학 등...

 

 

<사진 출처: 구글 검색>

첫 번 째로 발길이 멈춘 곳은 이글루 모양의 벙커,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국회사이, 중앙대로와 이스마일 Qemali 거리의 코너에 위치하고 있다. 벙커는 엔버 호자시대에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하자 알바니아는 바르샤뱌 조약에서 탈퇴하고 자체 방어 정책으로 전국 곳곳에 75만개의 벙커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이스마일 케말리(알바니아 독립운동가)동상, SPAC 수용소(알바니아 공산주의 정치적 감옥)의 콘크리트 기둥과 베를린 장벽의 조각을 갖추고 있었다.

 

* 호자(1908~1985) : 알바니아 민족해방전선, 알바니아 공산당 창건,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당 노동당 총서기, 독재자, 폐쇄정치, 무신론 국가 선언

 

 

베를린 장벽의 조각 -촬영 이수현-             이스마일 케말리(알바니아 독립운동가) -촬영 이수현-

                                                                                                               

바로 옆에 소박하게 보이는 대통령궁, 1928년부터 10년 동안 들어섰던 알바니아 왕국의 아호메트 조그1세가 왕궁으로 쓰려고 짓다가 2차대전 때 점령군으로 온 이탈리아군에게 폐위 돼 쫓겨난 뒤 이탈리아 총독 관저로 쓰였다고 한다. 문패(?)도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무슨 건물일까 궁금할 정도로 평범한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피라미드 건물은 Enver Hoxha의 딸의 디자인에 따라 1987년에 호자의 기념 박물관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이 건물 앞에서 연설을 했던 곳이고, 현재는 TV 방송국으로 사용하다가 버려진 건물이다. 외관의 대부분은 유리 파손, 낙서가 가득한 벽면, 진입로의 깨진 보도블럭, 흉물로 남아있었다.

 

 

 

에템베이 모스크(Mosque of Ethem Bey)
터키 지배 시절 1789년 몰라 베이에 의해 시작되어 1823년 그의 아들 에템 베이에 의해 완공되어 그의 이름을 따왔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공산주의 시절에는 폐쇄되었다가 1991년 공산당이 몰락한 후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바니아는 1967년 세계 최초로 공식 무신론 국가 선언을 했었다. 당시 독재가 엔베르 호자의 명령으로 모든 교회와 모스크가 파괴되거나 운동경기장이나 창고 같은 시설로 개조되었다. 실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었다. 어느 모스크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이곳에는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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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크루예

Posted by 지오VR
2015.09.12 20:51 세계지리답사/알바니아

크루예

<사진 클릭하시면 360도 VR Panorama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알바니아에 도착해서 첫 답사지는 크루예(Krujë, 크루야: Kruja)다. 알바니아어로 "샘"을 뜻한다고 한다. 수도 티아라에서 북쪽으로 공항을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 밖 멀리 산등성이에 도시가 보였다. 나는 그 곳이 크루예임을 직감하고 주변에 있는 일행들에게 말했는데, 대부분 미심쩍은 얼굴이다. 무슨 근거로? 마케도니아에서 온 가이드조차 반응이 별로다.


내가 '크루예'라고 단정적으로 말한 이유는, 답사 출발하기 전, 크루예의 위치를 구글어스로 파악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북서방향으로 발달한 산지와 확연히 드러나는 단층선 그리고 크루예의 배경이 되고있는 대략 1150m 높이의 산과 여기 저기 파헤쳐진 큰 구덩이... 난 그 구덩이를 석회암 광산으로 추정하였고, 부근에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멘트 공장을 찾아보았는데, 상당한 규모의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 석회암이 나타나리라 추정한 이유는 ‘카르스트’ 용어와 알바니아의 ‘알바’의 유래 때문이다. 



         


카르스트라는 말은 슬로베니아의 크라스(Kras) 지방의 독일어 명칭이다. 이 지방에는 중생대에 형성된 석회암이 두텁게 분포하여, 용식에 의한 지형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가 최초로 진행되어, 후에 같은 종류의 지형을 나타내는 통칭으로서 ‘카르스트’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발칸반도 북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로부터 이곳까지 디나르알프스산맥의 연장선이다. 이곳도 석회암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알바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리스까지 가는 여정 속에서 석회암은 계속 볼 수 있었다.


 

 알바니아의 ‘알바’는 라틴어의 ‘하얀’과 관계가 있고, 로마인들이 일찍이 석회암 지대가 많아서 ‘하얀 나라’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알바니아가 되었다고 설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이와 연관시켜, 내가 대단한 지리학자인양 잘난 체 했던 것인데... 현지 운전기사의 시멘트 공장이 있다는 발언이 있고나서야 나의 말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크루예 뒤쪽의 산체는 아침 안개로 흐릿하지만 분명 하얗게 보였다. 그리고 크루예에서 하루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인 모습은 석양의 햇빛을 받아 확연하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크루예는 1190년 알바니아인이 최초로 세운 민족 국가인 아르버르 공국(1190년 ~ 1255년)의 수도였으며 그 뒤에는 중세 알바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지만 1443년부터 1468년까지는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 장군이 지배하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수십차례 물리친 역사적인 장소이다.


스칸데르베그 박물관

 스칸데르베그 장군은 중세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이다. 북알바니아의 호족 기온 카스트리오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430년경, 부친이 오스만제국의 종주권을 받아 들였으므로 당시의 관습에 따라 형들과 함께 오스만 궁정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 곳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시종으로서 근무하였다. 무용(武勇)이 뛰어난다는 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과 관련된 스칸데르라는 이름을 수여받았으며 군사령관(베그)으로서 종군하였다. 그는 1437년경 아버지의 영지 티마르(timār, 군사봉토)를 수여받고 시파히(기사)로서 고향에 돌아왔다.

 1443년 오스만제국군이 헝가리의 민족영웅 프냐디·야노슈와의 분쟁을 틈타서 민족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하여 북알바니아를 통일하였다. 이후 25년 간, 나폴리 왕국, 로마 교황, 베네치아 등의 원조도 얻어, 오스만제국군으로부터 국토를 지켰다. 1468년에 그가 병사하자, 알바니아는 다시 오스만제국에 합병되었으나 그의 저항정신은 민중 사이에 전해졌다.

 19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사상이 높아지자,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으로서 서사시와 전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알바니아 국민문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나임·프라샤리의 『스칸데르베그의 이야기』(1896)와 팬·노리의 『스칸데르베그의 역사』(1921)는 알바니아인의 통합에 큰 역할을 했다.





알바니아는 알바니아어로 슈치퍼리아(Shqipëria), 슈치프는 독수리를 의미한다. 알바니아 국기에는 독수리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스스로 독수리의 후손이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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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페 walking tour

Posted by 지오VR
2015.09.06 03:19 세계지리답사/마케도니아

스코페 walking tour


<360도 VR파노라마, 사진을 클릭>

스코페에 도착해서 첫 방문지는 테레사수녀 기념관이었는데, 테레사수녀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돌다리와 광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위 사진 돌다리(Stone Bridge)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만들고, 오스만제국 때 재건립 되었다고한다. 시내 번화가와 구시가지를 연결한다. 


스코페는 1963년에 1070명의 사망자와 12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내고 시의 약 80%를 폐허로 만들었던 강한 지진이 일어난 후 시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여러 개의 위성 주거지역과 4개의 공업지역을 갖추고 지진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도시계획이 구상되어 구시가지 쪽 바르다르 가에는 마케도니아 대의기구가 들어 있는 건물과 교육기관, 도서관, 텔레비전 방송국 등이 들어서게 되었고, 신시가지 쪽은 경제 및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재건 후 현대적 건물이 많아졌고 시내에는 로마 시대의 수도, 성채, 성당 등이 남아 있다. 재건 과정에서 이 도시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강한 투르크적인 면모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돌다리 아래 쪽에 막 다이빙하려는 여자와 물속으로 막 들어간 사람의 발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무슨 의미일까?  

스코페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한 시민은 해마다 이곳에서 바르다르강에 십자가를 던져 제일 먼저 건져오는 사람이 우승하는 행사가 있는데 그것을 재현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고보니 오흐리드 호수가에 수영복입고 십자가를 들고 있던 남자 조각상이 생각난다. 이름도 만든 사람도 알 수 없는 조형물, 해석의 자유로움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돌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간다. 가는 길에 만난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 흔쾌히 사진을 같이 찍어준다. 구시가지에는 사람들의 삶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바자르가 있다. 바자르 골목에는 15세기중반(1452)에 지어진 Kapan Han(대상 숙소)가 있었는데 손님과 상인을 위한 44개의 객실을 갖추고, 말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는 전통적인 마케도니아어 음식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Kapan Han을 빠져나와 찾은 곳은 Čifte_Hammam(마케도니아어 : Чифте-амам), 공중 목욕탕이다. 15세기에 지어진 공중 목욕탕은 남성, 여성 룸이 각각 떨어져 있다고 들은 것 같다. 2001년부터 마케도니아의 국립 미술관의 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들어가보지 않았다.


바자르를 빠져나와 스코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칼레요새로 가는 도중 무라트 파샤 모스크와 정교회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장 아름답다는 모스크는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17 또는 18 세기 초에 지어진 church of Holly Saviour를 들어갔다. 종탑과 석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닥의 대리석 장식문양은 소박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였다. 프레스코와 iconostasis의 아름다움이 놀랍다고 하는데 실내로 들어갈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건물 아래 쪽 벽에 십자가는 성직자의 묘라는 설명을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칼레요새는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의 도시 스쿠피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재건하고 10세기에서 11세기사이에 확대 건설하여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1963년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졌다. 2006년 말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기원전 3000년경에 사용했던 목관악기와 찰흙 장식품등이 발견되었고 요새 밑에선 집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

스코페 광장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동상이 있었다. 분명 마케도니아 역사와 관련있는 인물일텐데 기억에 남는 건 알렉산더 대왕 동상이다. 

광장은 지금도 조성중이었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는 역시 어린이들의 놀이터, 분수가 개장(?)된 걸 처음 본다는 동행한 한인회장님, 마케도니아는 계속 아주 빠르게 관광사업에 매진중임을 알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에는 한국인이 11명(2015년 현재), 4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와 우리나라는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는 그리스와의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을 두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서로 자신의 조상이라고 맞서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모습을 본뜬 초대형 동상이 마케도니아에 세워져 있다. 대놓고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동상은 누가 봐도 애마 부세팔루스를 탄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서 주조된 채 공수돼 조립되는 이 동상은 22m(발판 10m 포함) 높이의 초대형 크기로, 건립 비용만 530만유로(83억원)에 이른다. 평균 월 임금이 440달러에 불과한 마케도니아로서는 상당한 비용 지급을 감수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마케도니아 안에선 니콜라 그루에프스키 총리가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괜한 민족주의를 조장해 그리스와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나올 정도다. 


알렉산더 동상 건립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둘러싼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양국 간의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가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제정하면서, 그리스와의 마찰이 시작됐다. 그리스 정부와 학계는 동상건립에 대해 마케도니아가 자국의 역사유산을 가로채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유고연방 붕괴 후 그리스 북부지역 명칭인 마케도니아와 똑같은 이름을 국호로 도용하더니 이제는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역사까지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는 외교적으로는 ‘마케도니아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케도니아가 테살로니키 동상보다 훨씬 웅장한 알렉산더 대왕 동상 건립으로 역사논쟁에 쐐기를 박으려 하고 있다. 


스코페

바르다르강(Vardar R.)상류에 위치해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 사이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로 마케도니아 인구의 25%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도시명칭은 1912년 우스쿠브(Uskub)에서 스코플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페(Skopje)로 불리었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해왔으며, 이러한 흔적들은 오래된 칼레(Kale)요새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대 일리리아족의 중심지였던 스쿠피에서 비롯된 스코페는 4세기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다르다니아 지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518년에는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7세기에는 슬라브족에게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9~10세기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1189년 세르비아인들이 처음으로 이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1392년 투르크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이 시를 지역 중심지로 삼아 상업요지로 만들었지만 1689년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진성 콜레라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 시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19세기에 베오그라드-살로니카(그리스) 간 철도가 건설되면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조약에 따라 1913년 세르비아에 합병되게 되었고 1918년에는 신생국인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1941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인들에게 점령당했고 그 후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주둔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4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 통합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서 독립되면서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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