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리답사/마케도니아: 2개의 글

스코페 walking tour

Posted by 지오VR
2015.09.06 03:19 세계지리답사/마케도니아

스코페 walking tour


<360도 VR파노라마, 사진을 클릭>

스코페에 도착해서 첫 방문지는 테레사수녀 기념관이었는데, 테레사수녀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돌다리와 광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위 사진 돌다리(Stone Bridge)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만들고, 오스만제국 때 재건립 되었다고한다. 시내 번화가와 구시가지를 연결한다. 


스코페는 1963년에 1070명의 사망자와 12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내고 시의 약 80%를 폐허로 만들었던 강한 지진이 일어난 후 시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여러 개의 위성 주거지역과 4개의 공업지역을 갖추고 지진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도시계획이 구상되어 구시가지 쪽 바르다르 가에는 마케도니아 대의기구가 들어 있는 건물과 교육기관, 도서관, 텔레비전 방송국 등이 들어서게 되었고, 신시가지 쪽은 경제 및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재건 후 현대적 건물이 많아졌고 시내에는 로마 시대의 수도, 성채, 성당 등이 남아 있다. 재건 과정에서 이 도시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강한 투르크적인 면모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돌다리 아래 쪽에 막 다이빙하려는 여자와 물속으로 막 들어간 사람의 발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무슨 의미일까?  

스코페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한 시민은 해마다 이곳에서 바르다르강에 십자가를 던져 제일 먼저 건져오는 사람이 우승하는 행사가 있는데 그것을 재현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고보니 오흐리드 호수가에 수영복입고 십자가를 들고 있던 남자 조각상이 생각난다. 이름도 만든 사람도 알 수 없는 조형물, 해석의 자유로움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돌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간다. 가는 길에 만난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 흔쾌히 사진을 같이 찍어준다. 구시가지에는 사람들의 삶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바자르가 있다. 바자르 골목에는 15세기중반(1452)에 지어진 Kapan Han(대상 숙소)가 있었는데 손님과 상인을 위한 44개의 객실을 갖추고, 말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는 전통적인 마케도니아어 음식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Kapan Han을 빠져나와 찾은 곳은 Čifte_Hammam(마케도니아어 : Чифте-амам), 공중 목욕탕이다. 15세기에 지어진 공중 목욕탕은 남성, 여성 룸이 각각 떨어져 있다고 들은 것 같다. 2001년부터 마케도니아의 국립 미술관의 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들어가보지 않았다.


바자르를 빠져나와 스코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칼레요새로 가는 도중 무라트 파샤 모스크와 정교회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장 아름답다는 모스크는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17 또는 18 세기 초에 지어진 church of Holly Saviour를 들어갔다. 종탑과 석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닥의 대리석 장식문양은 소박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였다. 프레스코와 iconostasis의 아름다움이 놀랍다고 하는데 실내로 들어갈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건물 아래 쪽 벽에 십자가는 성직자의 묘라는 설명을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칼레요새는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의 도시 스쿠피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재건하고 10세기에서 11세기사이에 확대 건설하여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1963년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졌다. 2006년 말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기원전 3000년경에 사용했던 목관악기와 찰흙 장식품등이 발견되었고 요새 밑에선 집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

스코페 광장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동상이 있었다. 분명 마케도니아 역사와 관련있는 인물일텐데 기억에 남는 건 알렉산더 대왕 동상이다. 

광장은 지금도 조성중이었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는 역시 어린이들의 놀이터, 분수가 개장(?)된 걸 처음 본다는 동행한 한인회장님, 마케도니아는 계속 아주 빠르게 관광사업에 매진중임을 알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에는 한국인이 11명(2015년 현재), 4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와 우리나라는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는 그리스와의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을 두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서로 자신의 조상이라고 맞서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모습을 본뜬 초대형 동상이 마케도니아에 세워져 있다. 대놓고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동상은 누가 봐도 애마 부세팔루스를 탄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서 주조된 채 공수돼 조립되는 이 동상은 22m(발판 10m 포함) 높이의 초대형 크기로, 건립 비용만 530만유로(83억원)에 이른다. 평균 월 임금이 440달러에 불과한 마케도니아로서는 상당한 비용 지급을 감수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마케도니아 안에선 니콜라 그루에프스키 총리가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괜한 민족주의를 조장해 그리스와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나올 정도다. 


알렉산더 동상 건립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둘러싼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양국 간의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가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제정하면서, 그리스와의 마찰이 시작됐다. 그리스 정부와 학계는 동상건립에 대해 마케도니아가 자국의 역사유산을 가로채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유고연방 붕괴 후 그리스 북부지역 명칭인 마케도니아와 똑같은 이름을 국호로 도용하더니 이제는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역사까지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는 외교적으로는 ‘마케도니아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케도니아가 테살로니키 동상보다 훨씬 웅장한 알렉산더 대왕 동상 건립으로 역사논쟁에 쐐기를 박으려 하고 있다. 


스코페

바르다르강(Vardar R.)상류에 위치해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 사이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로 마케도니아 인구의 25%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도시명칭은 1912년 우스쿠브(Uskub)에서 스코플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페(Skopje)로 불리었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해왔으며, 이러한 흔적들은 오래된 칼레(Kale)요새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대 일리리아족의 중심지였던 스쿠피에서 비롯된 스코페는 4세기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다르다니아 지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518년에는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7세기에는 슬라브족에게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9~10세기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1189년 세르비아인들이 처음으로 이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1392년 투르크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이 시를 지역 중심지로 삼아 상업요지로 만들었지만 1689년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진성 콜레라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 시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19세기에 베오그라드-살로니카(그리스) 간 철도가 건설되면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조약에 따라 1913년 세르비아에 합병되게 되었고 1918년에는 신생국인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1941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인들에게 점령당했고 그 후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주둔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4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 통합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서 독립되면서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세계지리답사 > 마케도니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코페 walking tour  (0) 2015.09.06
오흐리드 투어  (0) 2015.09.02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

오흐리드 투어

Posted by 지오VR
2015.09.02 00:27 세계지리답사/마케도니아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사진을 클릭하시 오흐리드의 14지역을 360도 VR투어하실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오흐리드호(湖)의 북동쪽 연안에 있다. 9세기 후반에 불가리아인에게 정복되어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宣敎)의 거점이 되었다. 중기 이후의 비잔틴 미술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마케도니아 주요 휴양지의 하나이며, 고기잡이와 자동차부품·진주가공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10~11세기에 축성한 요새의 잔해가 남아 있으며, 성소피아 대성당(11세기)·성클레멘스 성당(1295) 등 많은 성당이 있으나, 오스만 제국 통치시대(1398~1912)에 대부분 이슬람교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철도·고속도로·항공망을 통해 스코페와 연결된다.

 

마케도니아 역사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세계를 정복했던 때부터)의 대부분은 오늘날 그리스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마케도니아가 사용하는 국명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항상 논란을 제기한다. 로마인이 고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을 기원전 2세기중반에 정복했었고, 기원4세기 로마제국이 분열할 때 이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배하는 동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슬라브족은 이곳에 7세기에 정착하여 이 지역의 민족성을 바꾸어버린다.
이 지역은 9세기 불가리아인 짜르 시메온(tsar Simeon)에 의해 점령당한다. 그 후 짜르 사무엘(Samuel)의 지배하에서 마케도니아는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의 중심이 된다. 1014년 사무엘이 비잔틴제국에 패배함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비잔틴제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국가에 의해 번갈아 지배되는 긴 세월이 시작되었다. 1389년 터키가 세르비아에 대승하여 발칸국가들은 오토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역문화 또한 변하였다.


1878년 러시아는 터키를 패배시킨 후,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이양한다.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중심에 그들의 강력한 기지를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서방 강대국들은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를 터키에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1893년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로부터 독립투쟁을 위해 마케도니아 내 혁명기구(IMRO: 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sation)를 조직하며, 1903년 5월 일린덴(Ilinde) 봉기로 투쟁의 절정을 이룬다. 이 후 3개월 동안 잔인하게 억압 당한다. 민족지도자였던 고체 델체프(Goce Delcev)는 반란이전에 죽었지만 그는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연합하여 터키에 대항했던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때는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배척하고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다. 이런 결과에 실망한 IMRO는 세르비아 왕권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에 대해 베오그라드의 전시정부는, 마케도니아 언어는 물론 마케도니아란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응한다. 일부 IMRO 요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가리아의 점령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티토의 빨치산에 가담하다. 전쟁 후 마케도니아는 미래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완전한 공화국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것에 1943년 동의한다. 1952년 최초로 마케도니아 문법이 출판되었고 독자적인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마케도니아인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종집단이라는 것을 인식한 베오그라드 정부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불가리아의 요구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91년 9월 8일 마케도니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 74%가 독립을 원하였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정부는 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처음 베오그라드는 마케도니아 주둔 연방군대를 철수하도록 협조를 했고, 분할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도로와 철로 등이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중반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지대, 특히 잠재적인 화약고인 코소보와 가까운 지대를 감시할 목적으로 천 여명의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은 그리스북부 지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국명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마케도니아의 외교적 승인을 미루었다. 그리스는 만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란 국명을 사용하면, 그들이 오늘날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대 마케도니아 영토에 대한 권리의 실질적인 합법성을 마케도니아인들이 제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정부의 지속적인 입장에 따라, 마케도니아는 하는 수 없이 1993년 4월, '잠정적으로'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YROM)이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유엔이 재가해 줄 것을 신청한다.
 2년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1993년 12월, 강한 그리스의 반대가 있었지만 유럽연합의 6개국과 외교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1994년 2월 미국도 FYROM를 인정한다. 그러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경제통상 금지를 선언하고 마케도니아와의 무역항인 테살로니키 항구를 폐쇄한다. 마케도니아가 국기를 바꾸고 국호에 관해 그리스와 협의에 들어 간다는 동의를 한 후인 1995년 11월 통상금지령은 철회된다. 곧 이어 협의가 시작되었으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이 차량폭발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지금까지 이 난제 해결을 위한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코소보사태를 기억한다. 1999년 3월부터 6월까지 계속되었던 나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코소보 폭격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피난처를 찾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로 넘쳐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분쟁을 한번에 종식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의 군부대를 폭격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난에 허덕이는 마케도니아에 수십만의 난민이 들어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많이 쓰이는 키릴문자는 테살로니키 출신의 두 형제 성 키릴(St Cyril)과 성 메토디우스(St Methodius)에 의해 9세기에 개발된 알파베트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 문자는 오흐리드의 한 수도원에서 규율을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동 슬라브를 거쳐 전파되었다. 거리이름은 키릴문자로만 쓰여져 있고, 도로표시는 키릴과 라틴어 모두로 표기되어 있다.

'세계지리답사 > 마케도니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코페 walking tour  (0) 2015.09.06
오흐리드 투어  (0) 2015.09.02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