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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전남

조광조 유배지

 

조광조 적려유허비 (360VR 보기_사진클릭)

전남 화순 능주,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2012. 11.24 촬영)

적려(謫廬)란 귀양(유배)을 말하며, 유허비는 선현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를 말한다.


조광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김종직, 김굉필 이후 사림의 맥을 계승하였다. 1510년(중종 5년)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한 후,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도학정치란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정치이며, 그 원류는 유학에서 이상시대로 알려진 요순시대의 정치를 말한다.

정치 개혁에 착수하여, 관리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고 성리학적 생활규범인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여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하였다.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는 이른바 위훈 삭제 사건이 일어났다. 훈구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었기에 결국 훈구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여 이를 근심하는 중종에게 훈구세력 남곤과 심정 등이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간언하였다. 또한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走肖는 즉 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라 하여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아뢰어 중종의 마음을 돌려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들이 하옥되고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조광조 이하 70여 명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지만, 기묘사화로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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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①무오사회 ②인조반정 ③을사사화 ④단종의 복위운동 ⑤기묘사화



조광조 적려유허비.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애우당(愛憂堂)에는 정암(靜庵)의 글들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절명시(絶命詩)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거짓 없는 이내 정성을 환하게 비추리라

조광조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관으로 쓸 나무는 얇은 것으로 하라. 두껍고 무거운 송판을 쓰면 먼 길 가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러고 나서 조광조(趙光祖)는 곧바로 마당으로 나가 땅에 무릎을 꿇고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_조광조(趙光祖)의 최후의 진술

士生斯世 所恃者君心而己 이 세상에 선비로 태어나 믿을사람은 임금님뿐
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 올바른정치를하고 기강에 병통이 되는 근원을 제거하기위하여
故慾新國脈於無窮而己 새롭게 무궁한 맥을 찾고자 하는 일 입니다.
頓無他意 여타에 다른 생각이 없음을 머리숙여 말씀 올립니다.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_조광조의 심경을 알 수 있다

誰憐身似傷弓鳥 누가 화살 맞아 상처 난 새의 신세 가련히 여길까
自笑心同失馬翁 말 잃고 허전한 늙은이 같은 마음 스스로 웃노라
猿鶴正嗔吾不返 원학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해대지만
豈知難出伏盆中 복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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