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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전북

전주사고와 무주 적상산사고

전주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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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경기전에 위치한 전주사고, 사고는 국가의 주요 서적을 보관하는 곳으로 조선 건국 후 한양(내사고)과 충주(외사고)에 나누어 설치하였다. 내사고인 한양의 춘추관은 열람하기 편하므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하고, 외사고인 충주사고는 열람보다는 보존이 목적이므로 문서고에 해당한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은 한질만 있었고 충주사고에 봉안되었다.

 

 

 

세종 21년(1439) 전라도 전주와 경상도 성주에 외사고를 설치하여, 조선전기 4대사고가 운영되었다. 전주에 조선왕조실록이 실제로 봉안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 27년(1445)의 일이다. 충주사고에 있던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을 3부 더 필사하여 봉안하였다. 세종 27년 겨울 전주성내의 승의사(僧義寺, 현재 한지산업진흥센터 부근)에 실록을 보관하였으며, 세조10년(1464) 가을에는 진남루(鎭南樓, 현재 객사 후원)로 실록을 옮겼다. 전주사고 실록각 건물이 경기전 진전 동쪽에 건립된 것은 성종 4년(1473)이다. 인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으로 동원하여 실록각을 건립하였고 이 실록각에 성종 4년 8월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기 시작하였다.(임진왜란 직전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 1,344책 봉안)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4개의 사고 중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모두 불타 없어졌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오희길, 손홍록, 안의, 그리고 승려 희묵의 빠른 대처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은 정읍의 내장산, 해주의 관아, 영변의 묘향산 등지를 떠돌다가 강화도에 보관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사고를 인적이 드물고, 보다 안전한 깊은 산속에 설치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현재 전주사고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

 

임진왜란 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실록을 재간행(1603~1606)하여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외사고가 설치되어 내사고인 춘추관과 함께 5개의 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이후 정족산사고로, 묘향산사고는 여진족의 침략 위험이 높아지자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동 설치되었다.

 

무주의 적상산사고는 1614년(광해군 6)에 건립되었다.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묘향산 사고를 안전한 남쪽으로 옮겼다. 적상산 정상부는 평탄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험준한 지형인데다 산성이 축성되어 있어 실록을 보관하기에 안전했다.

 

 

 

  무주 적상산 사고

 

1992년 적상산의 정상에 양수발전소 상부저수지가 생기면서 사고를 수호하던 안국사와 사고지는 물속에 잠기게 되어, 안국사는 산 정상의 아래에 있는 호국사 인근으로 옮겨갔고, 사고는 원위치에서 조금 높은 지대로 옮겨서 중건하였다. 적상산 사고의 사각과 선원각 건물이 복원된 것은 1998년이다.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로 갔다가 대한제국의 구황실을 관리하던 이왕직이 돌려받았다. 이왕직은 실록을 창경궁에 보관했으며 6.25때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이 이를 가지고 갔다. 현재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김일성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재의 전주사고는 1991년에 무주 적상산사고를 본떠 복원한 건물이다. 사고안의 모습과 사고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화기 위해 전주사고에 작은 전시실을 꾸며 관람객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다.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포쇄를 했다. 포쇄란 책의 습기를 제거하고 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책을 상자에서 꺼내어 차일을 친 그늘에서 말리는 것을 말한다. 평상시 사고의 서적은 명주 보자기에 싸서 상자 안에 넣어두었고, 천궁 가루나 창포 가루를 담은 자루를 함께 두어 서적의 손상을 막았다. 포쇄를 하게되면 사고의 문을 열고 상자에서 서적을 꺼내게 된다. 그래서 사고의 문을 열려면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한림)이 동참해야 한다.

 

 

포쇄는 2년 내지 4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거행했다. 전주사고에서 포쇄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장마철을 피해 봄이나 가을의 맑은 날을 택해 바람을 쐬고 햇볕에 말리는 포쇄 작업을 정기적으로 거행했다. 책을 거풍(擧風:바람을 쐬는 것)시켜서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서적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남노송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교동, 풍남동에서 살았기에 경기전의 모습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경기전 담들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담과 담사이를 아(亞)형의 철조형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홍살문과 고목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정전은 언제나 굳게 닫쳐있어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정전 동쪽 담 넘어 현재 전주사고가 있는 자리에는 아치모양의 현대식 건물 전라북도 박물관이 있었다. 경기전에서 전주시민의 날 행사도 열렸고, 전주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오목대에서 불꽃놀이도 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과 전주사고(이동희),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이상찬), 네이버캐스트 '외사고'(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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