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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전북

나제통문

 

나제통문 VR답사 (사진 클릭)

 

[촬영일시 2006. 9. 23]

 

학창시절 논문 주제지역으로 생각한 적이 있는 곳이다.
나제통문을 지나 무풍에 들어섰을 때 완전히 다른 말씨에 당황했다.
이곳은 전라북도인데 경상도 말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와 역사관련 문헌을 찾아 이것 저것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언어와 생활풍속이 경상도에 가깝다.
역사적 기록을 보니 무풍현은 신라땅, 주계현은 백제땅.
신라 무열왕 6년, 백제 의자왕 19년(659년) 신라 김유신의 군사 1만명과 백제 좌평 의직의 3천명이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전투지역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인 이 부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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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나제통문, 일제가 만든 굴?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위치한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 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은 높이 5~6m 너비 4~5m 길이 30~40m인 굴로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굴이 삼국시대부터 있던 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뚫은 굴 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추적해 역사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을 삭제하게 만든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상임연구위원인 역사학자 오재성씨는 "이 굴의 원래 이름은 기니미굴" 이라며 "1910년경 일본 사람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신속히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였다"고 설명했다.
(영동에 있는 용화금광 개발을 위해서 뚫은 터널)

 

그래서 당시 이 '기미니굴'을 중심으로 위쪽마을은 '기니미 마을'로 아래쪽은 '이미리 마을' 이라 불렀다. 이 굴의 명칭이 바뀐 것은 1963년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부터. 이때부터 '기니미굴'이 '나제통문'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등장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코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62년 4월 20일 구천동 33경, 교통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10대 관광지)

 

이런 사실은 지역 노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굴을 뚫을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다. 그러나 무주군의 행정기록을 적어놓은 '무주군청지 적성지(赤城誌)'에 당시 공사를 한 작업일지가 적혀있다고 한다.

 

우리민족사연구회에 따르면 지리적으로 살펴봐도 무주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남 거창으로 향하거나 반대로 그 쪽에서 무주로 들어설 때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즉 이 굴은 현대에 와서 드나들기 편하게 만든 굴일 뿐이지 결코 삼국시대에 존재하던 굴이 아니란 것이다.<출처 미디어다음>

 

무풍은 삼한시대에는 변진의 감문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치소(治所)였다. 신라의 변방(邊防)이던 무산은 백제의 적천현과 국경을 이루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무풍(茂豊)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성종 때에는 신라권역의 영남권에서 백제권역인 호남권으로 편제되어 강남도 남원부 진례현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명종 때 실시된 감무제(監務制)에 따라 무풍현의 감무가 주계현의 행정까지 관할하였고 한 때는 병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풍과 주계가 통폐합되어 무주(茂朱)라는 새로운 지명이 생기면서 치소가 주계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풍은 무주현에 딸린 면(面)단위의 행정구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무풍의 행정구역은 풍동면(豊東面. 현재의 현내리, 지성리, 금평리)과 풍남면(豊南面. 현재의 철목리, 증산리, 은산리)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즉 무주군이 6개 면으로 나뉘게 되는데, 무풍은 풍동과 풍남을 통폐합하고 종전의 횡천면(橫川面, 지금의 구천동덕지리 지역)에 속해 있던 덕동과 오정동을 편입시키면서 옛 명칭을 다시 살려 무풍면이 된 것이다. 1414년 무풍현이 폐지된 후, 500년 만에 옛 지명을 되찾은 것이다. <출처 무풍면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