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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전북

벽골제

 

 

벽골제는 저수지다.  <사진클릭 vr파노라마>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의 저수지와 그 제방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벽골제는 고려·조선시대를 지나며 보수·중수되어 왔다.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벽골제 일대의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현재 벽골제는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벽골지(), 저수지로 적고 있다.

삼국사기 흘해이사금 21년(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삼국사기에는 흘해이사금 21(백제 비류왕 27, AD 330) 벽골지(碧骨池) 시개(始開)... 시축연도와 규모를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에 명백하게 지(), 저수지로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흘해 기축(329) 벽골제(碧骨堤) 시축(始築)... 제방의 길이, 벽골제의 수혜면적에 대해 적고 있다.

삼국사기 원성왕 6년(출처: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원성왕 6(AD790)에 전주 등 7주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증축했다는 기록은 신라 9주 중에 7주 사람들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 전국적 규모의 토목공사였다고 할 수 있다. 저수지의 규모와 중요성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려 준다.

 

<2015212일> 용골마을 지역에서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제방 동쪽 부분에서 보축 제방(補築 堤防,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에 설치한 보강 시설) 성토층 아랫부분에서 제방 보강을 위해 진흙을 담아 쌓은 주머니초낭(草囊, 혹은 토낭)을 확인하였다. 이 초낭은 나뭇가지, 앞사귀 등을 깔고 성벽, 제방의 흙을 튼튼하게 다져 쌓는 방식인 고대 부엽공법의 일종이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7세기 전후의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성왕 6(790)에 전주 등 7개 주() 사람들에게 제방을 쌓게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연구원 쪽은 설명했다. , 초낭에서는 흙과 함께 볍씨, 복숭아씨가 출토됐으며, 아래층에서는 민물에 사는 한해살이 물풀인 마름도 발견돼, 벽골제가 과거 민물 저수지(淡水池)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 1>  부엽층 평면 및 단면 전경 >                                                                         <그림 2>  벽골제 축조기술 토낭

 

고려시대, 벽골제 중수비문에 따르면 고려 현종 대(1010~1031)에는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수준에서 수리를 하였고, 인종 21(1143)에는 기존의 것 보다 규모를 크게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종 24년에 무당의 말을 듣고 애써 보수해 놓은 벽골제를 헐어 버렸다.

 

※ 저수지 아래 땅이 논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개국 초부터 수리시설 사업에 적극성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8(1408)부터 벽골제 중수 시도하였고, 전라도 관찰사 박습의 상소문 내용에는 수문의 존재저수지 아래 땅의 면적이 저수지 안의 3배에 해당하는 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태종 18년 우희열 상소문 수문이 다섯있어 1만여 경을 관개 할 수 있었습니다갑오년에 수축한 이후 둑 아래 넓은 들에는 화곡이 무르익어 이를 바라보면 구름과 같습니다.”  수문과 수로는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관개시설임이 명백하고둑 아래가 논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종 2(1420) 전라도 관찰사의 계에서, 벽골제가 터져서 둑 아래 있는 전답 2098결을 결딴내었습니다.” 는 이미 둑 아래의 땅은 경지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벽골제 물을 논에 대기 위한 다섯 개의 도랑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태종 15(1415)에 벽골제를 다시 고치고 그 중수 과정을 비석에 기록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중수비 항목에는 벽골제의 물을 끌어들여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다섯 개의 도랑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전형적인 저수지의 모습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수문에서 방출된 물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기술되어 있다. <그림 3>은 벽골제 중수 당시의 관개용 수로를 추정해 본 지도이고, <그림 4> 발굴조사 현황이다.

 

수여거와 유통거는 여수로였다수여거는 수월리(水月里) 1910년대 초 지도에는 수월리(水越里)로 표기되어있다이곳 사람들은 무네미 마을이라고 부른다수월이나 무네미(혹은 무너미)등의 모두 물이 넘어간다는 의미이다유통거의 위치는 1911년경 제작된 그림을 통해서 추정하면 <그림 5>와 같다.

 

 

 

 

<그림 3>  벽골제의 수원과 추정 관개용 수로

  (출처: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허수열, 한길사)                                            <그림 4> 벽골제 발굴조사                                           <그림 5>   유통거 추정 위치

 

 

 

<2016.3.29.> '중심거'(中心渠)의 형태와 축조방법을 확인 (전북 김제 부량면 신용리 219-5번지 일원)

 

 

 

 <그림 6, 7, 8 > 중심거 수로 바닥

 

 

<2020.4.23.> 1수문 수여거에 대한 자료 확보를 위해 김제시 신덕동과 장화동 일대 '무네미'로 불리는 수문 추정지(수여거) 시굴조사

 

 

 

 <그림 9>  수여거 수로 노출                                              <그림 10>수여거 수로 바닥                                          <그림 11>  수여거 수로 구조

 

 

 

 

 

  <그림 12>  수여거 도수로와 방수로                                                                       <그림  13>수여거 발굴 현장

 

 

다섯 개의 도랑의 기능에 근거하면, 일부 학자가 벽골제가 방조제 또는 저수답으로 벼베기가 끝나면 이듬해 모내기에 쓰려고 빗물을 가두어 두는 논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세종 2(1420)에 큰 홍수를 만나 무너지고 벽골제를 아주 없애 버리자고 전라 관찰사 장윤화가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인 1421(세종 3)에 다시 수축하라고 명하였다(金賢熙·崔基燁, 1990). 1421년 이후 조선시대의 벽골제 관련 기사는 1680(숙종 6)에 세운 전교비, 1684(숙종 10)에 다시 세운 1415년의 중수비 기록이 있다. 그 후 벽골제는 모경과 저수답의 제방 구실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서 대부분 벽골제를 웅덩이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제방 붕괴 후 남겨진 저수지 일부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시대(1927)에는 운암저수지 물을 유역 변경시켜 광활간척지로 보내는 간선수로의 제방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림 14>  대동여지도(1861)에 표기된 벽골제와 그 주변                        <그림 15> 1/5,000 수치지도에 표시한 벽골제 및 그 주변의 해발고도 6m 등고선 (자료출처: 장호, 2008)

 


벽골제 제방 아래가 갯벌, 갯논이었다면 죽산면 신흥마을은?

 

 

<그림 16>은 제방 아래 넓은 평야지역 가운데에 있는 신흥마을의 발달과정을 주민 공홍래씨의 증언(1984)을 바탕으로 조사하여 지도화한 것이다. 마을의 발달과정을 3단계로 서술하고 있다. 1700년대 말 이주정착단계로 공씨와 양씨, 권씨의 동족부락 형성, 1800년대 개척에 의해 농경지가 확보된 상태로 부락 내의 분가와 타지에서의 공씨, 권씨의 친족 이주, 190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농지정리가되고 농지를 수탈당하면서 기존의 주민들이 일부 전출해 가고 타지인들이 전입해오는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 지역이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갯벌이나 갯논이 아니었고 이미 농경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전북대학교 지리학보고4, ’산간부와 평야부의 취락 연구진안군 정천면과 김제군 죽산면을 중심으로- 이우석, 유남희, 1984>

 

 

 

 

 

 

 

 

 

                                                                                                                                                                                                                               <그림 16>  신흥마을 발달과정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허수열)

 

사실과 허구

 

조선 재래의 수리시설과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수리시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이 조선 재래의 수리시설은 과소평가하고 일본인들에 의한 개발은 과대평가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이 벽골제를 방조제라고 가정함으로써 그 둑 아래의 평야지대를 갯벌이나 갯논으로 간주하고, 그 과정에서 역시 재래적인 농업발전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인에 의한 농업개발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1910년대 초 김제 만경평야의 수리시설

 

 

1909년에 발간된 한 자료에 의하면 전주평야지역에 대한 일본인들이 들어온 것은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로 기간지(旣墾地)를 매입하여 거대농장을 창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다. 토지 소유권을 합법화하기 위한 토지가옥증명규칙 제정 압력, 군산농사조합 조직하였고, 특히 전주·평야지역은 평야지대에 비해 수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수리조합 설립을 위한 일본인 농사경영자들에 의한 수리조합 설치 움직임이 조선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활발하던 곳이었다. 고부수리조합 1916, 동진수리조합 1925년에 설립인가를 받았다

 

 

호남평야 특히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의 김제·만경평야는 고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공관개의 필요성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절실히 필요했고 활발히 전개되어왔던 이유가 바로 이런 지리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의 벽골제, 눌제, 근대의 만석보 등 평야지대에 발달한 관개시설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수리조합 설치 움직임은 동진북부수리조합(1910), 동진남부수리조합(1910), 동진강수리조합(1911) 설립 신청이 있었지만, 1925년에 동진수리조합으로 인가를 받는다. 동진강수리조합 신청서(1911)에는 용산보의 석조갑문 개축, 광산보 철폐, 죽산보 개축, 기타 재래의 수로는 모두 이용하고 보수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 공사 내역에 조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공사계획이 없다는 것은 이 지역은 조선시대 이래 이미 재래 수로와 제방이 존재하고 있었고, 조수의 피해 우려는 별로 없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인가되었을 때는 김제평야지대가 가진 수원부족의 문제를 섬진강 수게의 상류 댐을 막아 운암저수지를 축조하고 그 물을 동진강으로 역류시켜 김제간선수로를 비롯한 각종 용수로로 관개함으로써 해결하게 되었다.

 

 

1910년 전라북도의 수리시설

전라북도통계연보(1916)에는 전라북도에는 그 연안을 따라 103개소, 총연장 108km에 이르는 방조제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림 18>  동진북부수리조합구역도의 죽산지류 하구 부근도                                       <그림 19> 1921년 수정측도의 죽산지류 하구 부근 지도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경인문화사 영인본)

 

서포방조제

 

1910년 경에 작성된 지도<그림 18>에 불당리, 해창리, 동진, 원기리를 거쳐 가칠리로 가는 길 등의 도로 표시가 있다. 즉 이지역은 해안에 매우 가까운 곳이지만 조선시대에도 마을이 형성되고 그 마을을 잇는 도로가 발달했으며, 조선 후기에 원기리에는 장시도 섰다. 또 죽산리의 소류지와 해창리, 불당리, 하원리, 해창리와 서해 등으로 이어지는 수로도 표기되고 있고, 불당리와 하원리에는 다시 조그만 소류지도 보인다. 1910년경 이 지역에서는 이미 농경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림 19>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1916측도, 1921년 수정)에서 원평천(죽산지류) 하구에 하원리라는 마을이 있고 그 북쪽으로 방목리가 있다. 조금 오른쪽에 원기리, 조금 북쪽에 화동, 도로와 수로, 동진으로 가는 길이 있다. 지도에 나타난 하시모토 농장(橋本農場)은 전라북도발전사에 의하면 간척사업에 착수하여 10년 고생 끝에 150정보의 미전을 완성했다고 한다.(1912년에 간척 대부허가, 1922년에 간척사업 준공한국농어촌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서포방조제는 1929년에 준공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시모토가 준공한 서포방조제를 좀더 크고 견고하게 재시공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0년 경 이 지역은 이미 해안에 어느 정도의 방조제가 존재하고 있었고, 하천에는 제방이 축설되어 조수의 범람을 막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조선시대 말에는 벽골제 아래에까지 일상적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천과 둑과 보

 

1925년 만경강과 낙동강 개수사업이 시작되기 이전 조선총독부의 하천정책은 조사와 보존에 집중되고 있었다. 1921년 지도에서 발견되는 하천 주위의 제방은 일제 강점기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조선 재래의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림 20>  동진강구리조합 예정구역도의 죽산지류 하구 부근도(국가기록원 자료)

 

모내기가 끝나면 보를 터뜨려서 물이 빠지게 하는 보()를 보()라고 부른다. 죽산보가 그 대표적이 예이다. 매년 겨울철에 쌓았다가 봄에 무너뜨려서 수로가 없었고, 겨우 보를 무너뜨린 후의 물을 방비하기 위해 보의 측면에 방죽을 쌓았으므로 저수지가 있었을 뿐이다. 죽산보는 동진강 죽산지류(원평천)에 축조된 보로서 축산지류 인근 지역의 관개에 사용되었다<그림 20> 소제리 부근 동그라미 속에 두 줄이 그어져 있는데 아마 이곳에 보동을 설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죽산리 조금 아래에 제법 큰 소류지는 보동을 설치하면 그 상류에 물이 고인 보내로 묘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김제·만경평야에는 용산보, 죽산보, 용보 이외에도 수많은 보와 관련 수로가 축조되어 있었다.

 

동진농지개량조합50년사 와 전라북도통계연보(1913)에 의하면 제언과 보, 그리고 거기에 연결된 수로, 하천의 둑, 해안의 방조제 등 1910년 무렵 벽골제 아래의 평야지대에는 이런 조선 재래의 수리시설이 곳곳에 축조되어 있었다. 그러한 농업기반시설을 배경으로 농경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수많은 촌락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그림 21>  1/50,000 구 지형도(1934)에 표기된 간선수로로 바뀐 후의 벽골제와 그 주변 지형도(자료출처: 장호, 2008)

 

 

조선총독부 동진강 개수공사의 일환으로 1937년부터 원평천 개수공사도 착수하였다. 원평천의 물길을 죽산리에서 해창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도록 완전히 새로운 물길을 뚫는 공사였다. 새로 뚫은 원평천 하구 인근에 해창방조수문(해창갑문, 1940)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종전의 수리시설(죽산보수문, 재래 죽산보)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하천이 매립되어 경지로 바뀌면서 매몰되었다.

 

※ 1700년 전의 평균해수면은?

 

<그림 22>  8000BP 이후의 평균해수면 곡선의 3유형

<> A=황상일 1998 (일산), B=下山正一 1993 (福岡), C=양우헌 등 2008 (서해안). 단 황상일의 곡선은 원본에서는 평균고조위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평균해수면으로 환산하였다. BP는 '현재 이전'(before present)이라는 의미인데, 이 때의 '현재'는 때로는 195011일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세로줄은 벽골제가 축조되었다고 말해지는 AD 330년을 의미한다.

 

한국의 평균해수면에 관한 국내의 연구 이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3가지 유형의 주장이 있다. 점진적으로 상승해왔고 과거 8천 년간의 평균해수면이 현재보다 높았던 적은 없었다 주장, 진동 변화하지만 BP 5,6천 년 이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현재의 평균해수면을 상회한다는 주장, 현재 수준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면서 진동, 변화한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한국의 경우 4세기경을 해진기라고 보는 견해가 상당히 널리 펴져있지만 일본에서는 고분한랭기, 중국에서는 현대보다 기온이 1~2도 낮은 한랭 건조, 미국해양대기권국의 기온자료 정리에서는 4세기경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기본의 여러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판단해 본다면 4세기경의 기온이 현재보다 더 높았고 주장하기 어렵다. 4세기의 벽골제 인근 해역의 평균해수면이 현재보다 높았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벽골제가 저수지로 축조되었다는 것과 그 제방 아래로 광대한 면적의 수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허수열.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한길사 2011

장호, 벽골제와 그 주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에 관한 고찰, 문화역사지리 제20권 제1. 2008

김제 벽골제서 최대 폭 24m 수로 발굴, 연합뉴스 2020.4.23.

역사문화라이브러리, 벽골제서 통일신라 수로를 찾았다는데, https://historylibr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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