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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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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갈이(이모작) 같은 경작지에서 1년에 두 번 곡물을 수확하는 토지의 이용법. 보통 여름에는 벼, 겨울에는 보리·밀 등을 경작함. 이모작(二毛作). 가을걷이가 끝난 논은 그루갈이 준비를 한다. 그루갈이 작물도 다양해져 보리대신 마늘 또는 감자를 재배하는 곳도 있다. * 2모작과 2기작은 어떻게 다른가? ▶ 2모작은 한 토지에 서로 다른 작물을 번갈아가면서 재배하는것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그루갈이로 쌀을 수확 한 후에 그 토지에 보리를 심어 재배한다. ▶ 2기작은 한 토지에 같은 작물을 2번 재배하는 것 동남아시아 등에서 쌀을 한번 수확한 후에 다시 쌀을 재배하여 수확한다. 보리는 겨울철 추위를 보내야 한다. 보리밭이 얼어서 부풀어 오르거나, 따뜻해서 보리가 웃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중학시절 보리 밟기 행사에..
전주 도심의 변화 과정 전주 도심(CBD)정말 오랜만에 경원동 우체국 사거리 주변을 걸었다. 오가는 차와 사람이 적다. 후다닥 사거리 한 가운데 서서 네 방향의 도로와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과 도로는 깨끗해졌지만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전주에서 태어나 60년 넘게 살아오면서 전주의 중심이라 생각한 곳이 미원탑 사거리, 우체국 사거리, 관통도로 사거리 주변이다. 도심은 도시의 중심으로 중심업무지구(Central Business District)라 부르며, 도시의 정치와 경제가 집중된 곳이다. 어린 시절 전주의 행정과 상업기능이 집중된 곳은 경원동 우체국 사거리였다. 이 곳에는 도청과 시청, 금융기관과 상가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었다. 현재 도청과 시청은 다른 곳으로 옮겼고 금융기관 소수만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구도심?..
전주 남고산성 360 VR 내용은 동포루지와 억경대 상공에서 바라본 남고산성, 억경대, 만경대, 천경대, 서문, 서문암지, 북장대, 정몽주 암각서, 공덕비, 남고사, 관성묘 등으로 남고산성 VR답사가 가능합니다.(2003년 부터 2022년까지) 전주 남고산성 사적 제294호인 전주 남고산성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후백제의 견훤이 쌓은 고성이다. 현존하는 성벽은 조선 후기 순조13년(1813)에 만들어진 포곡형 조선시대 석성이다. 남고산성에는 남고산성의 성곽과 서암문지, 서문지, 동문지, 동포루지, 북장대등의 성곽시설과 남고진 사적비, 만경대의 정몽주 시 암각서, 남고사, 관우를 모신 관성묘 등의 문화 유적이 남아있다. 남고산성 입구에는 임진왜란 시 호남 방어에 큰 역할을 하였던 이정란을 모신 충경사가 자리하고..
전라감영 이야기 전라감영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올해(2022)로 전라도 이름이 지어진지 1004년이 된다. 전라도 지명은 고려 초 현종9년(1018)에 강남도(전주목 권역)와 해양도(나주목 권역)를 합쳐 전라도라 칭한 것이 처음이다. 전주에 처음부터 감영이 설치되었던 것은 아니고 임기 6개월의 안찰사(안렴사)가 순력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창왕 원년(1388)에 도관찰출척사(감사)로 부임한 최유경(1343~1413)이 최초 전라감사이다. 안렴사와 관찰사제가 반복되다가 조선 초기 태종때 관찰사제가 정착하면서 감영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감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다스리는 체제로 바뀌면서 감영 관아시설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순력: 관찰사가 자기 관할 내의 각 고을 민정을 시찰하기위..
이재 황윤석과 정철조, 정상기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1729~1791), 2003년, 클럽활동(CA) 마을답사반을 꾸려 성내면(전북 고창군)에 있는 유물과 유적, 인물을 조사하고 답사하면서 처음 알게 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그가 남긴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는 10세(1738)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기록한 자료이다. 이 책은 18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수학, 과학, 천문, 지리, 어학, 역법 및 신문물인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당시의 사회의 생활상을 알아낼 수 있는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성내면 조동리 조동마을에 황윤석 생가가 있다. 첫번째 방문 2003년 6월 5일 오후, 입구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제25호) 안내판이 있었고, 사랑채와 문간채 사이 대문은 잠겨 있..
전북 고창 병바위(호암) 병바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아산초등학교 뒤 높이 35m 바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호리병 또는 사람 얼굴로 보인다. 호리병 바위라는 뜻의 '호암'(壺巖)이라 불리었다. 병바위 전설 신선이 선운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타고 온 배를 배맨바위에 매어놓고, 백마를 타고 선운산 일대를 둘러보다가, 이 곳에 살고있는 할머니의 술대접을 받고 크게 취해 잠들어 술병과 소반을 걷어차고 말았다. 술병은 거꾸로 땅에 꽂혀 병바위가 되었고, 뒤집힌 금소반은 소반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병바위 주변의 바위나 마을의 이름에는 신선과 관련된 것이 많다. 신선이 말을 타고 내려와 술을 마시기 위해 안장을 얹어두고 탕건을 벗어 두었다는 안장 바위와 탕건 바위, 술에 취해 잠든 신선을 말이 울며 깨웠다는 마명 바위, 시끄러..
오수, 지명의 유래(주인의 목숨을 구한 의견) '오수(獒樹)'라는 땅이름의 유래 오수 지명은 이 지역의 의견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리(里) 지명이었으나 지역주민들의 건의로 1992년 오수면(獒樹面)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오수 의견 설화의 내용은 고려 시대 최자(崔滋)가 쓴 『보한집(補閑集)』과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해진다. 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
정읍 지명의 유래 정읍 지명 관련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현재 정읍에 해당하는 지역에 백제의 정촌현(井村縣 : 정읍현), 대시산군(大尸山郡 : 태인현),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 : 고부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에는 【建置沿革】本百濟井村縣新羅景德王改今名爲太山郡領縣高麗屬古阜郡後置監務本朝改爲縣監 (백제 때 정촌현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정읍현으로 고쳐 태산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에 들어서는 고부에 이속되었고, 뒤에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조에 현감을 두었다.)의 기록이 있다. 또한 【古跡】望夫石 在縣北十里縣人爲行商久不至其妻登山石以望之恐其夫夜行犯害托泥水之汚以作歌名其曲曰井邑世傳登岾望夫石足跡猶在 (망부석(望夫石)은 정읍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현의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