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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이야기

삼남대로 '갈재 옛길'(노령)따라 360VR 답사

갈재 옛길따라_360 VR 답사[백양사역~입암면사무소] ( 사진 클릭)



전라감영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들고 조선을 기록하다(2021, 알파미디어)를 읽게 되었다.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18845월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해군 무관으로 부임하여 정보 수집을 위해 1884111일부터 1214(44일간 1448km)까지 조선 남부 지역에 대한 조사 여행을 한다.

일기 형식의 조사기록으로 개인적인 감정과 느낌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고, 그림을 그리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여지도를 이용한 외국인의 조선 여행 기록으로 가마를 타고 여행하였지만 관아에서 제공한 숙소보다는 주막과 역원을 주로 활용하려 하였다.

 

포크, 1884년 포크의 여행 경로, 호조,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조선 보빙사와 함께 찍은 포크

함께 한 일행은 총인원 18명이었다. -조지 포크, 전양묵(양반, 일본어 통역), 정수일(서광범이 추천한 집사역할), 가마꾼 12, 말을 끄는 소년(3)과 하인(경숙이)- 2마리, 보교(가마) 3, 트렁크 5, 손가방 3, 사진기, 삼각대, 총기 상자, 돈 바구니...

처음 보는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화장실까지 따라오고 무례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생활과 에티켓이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집요한 시선들로 고통스러워하지만, 포크가 지나는 길과 마을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계속 추적하고 따르게 한다. 다음 일정 속의 지역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책을 놓지 못하고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여행 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한 긴박한 상황의 기록은 긴장감마저 몰고온다.

전라북도 부분(117~8일 용안, 9일 삼례, 10~11일 전주, 12일 원평, 13일 군영다리) 중 갈재에 들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앞쪽에는 우리가 따라왔던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산맥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의 조선 지도는 거의 정확했다. 우리 앞에는 분명 무척 높은 날카로운 바위 등성이가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은 그 사이로 곧바로 이어졌다. 왼쪽의 산은 갓바위산이었다. 북서쪽 구석에 날카롭고 높은 봉우리가 있었는데 형태가 말이나 요새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였다......<중략>이곳의 이름은 군령다리 마을로 의미는 ‘군대명령 다리’ 였다. 이곳의 위치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곳 같았다......<중략>여기는 큰 주막이었지만 끔찍하게 더럽고, 벌레가 많았으며, 진흙투성이의 무너져 내릴 듯한 가축우리 같은 오두막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중략>군령다리는 장성에서 40리 거리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노령

 

포크가 사용한 여지도




20086, 옛길을 찾아 군령다리(군령교)마을 앞 호남선 폐철도와 폐터널까지 가본 적이 있다. 14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 2022 421, 지형도(1924)와 구글위성지도(2022)를 중첩시켜 옛길을 추적해보고, 전남 백양사역에서 전북 입암면사무소까지 9.8km의 복원된 삼남대로 갈재 옛길을 걸었다.

현재 갈재(노령)는 호남고속도로터널, 1번국도터널, 1번국도(장성갈재), KTX고속철도터널, 호남선철도터널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폐호남고속도로, 호남선철도 복선화 이전의 호남선 폐철도길(1914)과 터널이 존재하며 신작로와 철도가 생기기 전 걸어서 넘었던 삼남대로 옛길이 있다.(입암면사무소천원역터입암저수지군령마을폐철도길갈재목란마을원덕 미륵불갈애바위백양사역)

도적떼들이 들끓어 군사들을 산 밑에 두고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했다는 기록 때문에 첩첩산중으로 생각하고 걸었는데,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기차의 소음이 산속 깊숙이 옛길까지 날아왔다. 사람들의 인적이 거의 없었는지 길가에 만들어 놓은 벤치는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 만큼 썩어 있었고 쉼터 정자는 지붕이 뜯겨진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202112월 국가지정 명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거의 관리가 안되고 있는 것 같다.(민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 422일자로 장성군청에 민원이 접수되었다는 문자가 오고, 2022512일로 민원처리 기간이 연장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5월12일 처리결과 답변문자 : 현재 인지하고 있으며,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되어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계획 예산확보를 해야하기 때문에 2023년도에나 가능할 것이라 함.....  그동안 관리는 해온 것인지?)

백양사역에 도착, ‘갈재길 종합안내판으로 갈재길 전체를 파악한 후 출발한다. 안내판에 오류가 있다. 갈재 넘어 굴다리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면서 이용되지 않고 있는데 여전히 굴다리가 표시되어있다.

갈재길 코스에서 굴다리 대신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

백양사역에서 나와 왼쪽길로 간다. 비오리 갤러리 문학관을 만나게 된다. 비오리는 오리과의 겨울철새로 원앙보다 금슬이 좋다는데, 갤러리 문학관을 세운 분들도 금슬이 좋은 부부라고 한다. 갤러리에서 부부의 시화 작품과 장성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갤러리 사거리에서 길 건너 방향표지판을 따라 700여미터 가면 호남선 밑을 지나는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막 빠져나오면 갈재를 넘어 오는 옛1번 국도다. 차량 통행은 많지 않으나 주의를 요한다. 위험하니 2차선 도로를 따라 걷지 않고 하천 잠수교를 건너 둑방길로 원덕마을까지 간다. 원덕교를 건너 약 200미터 직진하면 양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주의 해야한다.

방향표시판이 엉터리(2022년 4월 21일 현재)

방향표시판은 갈재정상을 왼쪽으로 안내하고 있지만, 이 방향표시판을 믿고 가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호남선 변전소가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갈재정상을 안내하는 방향표시판은 철도 안전 철조망 안에서 계속 길을 안내하고 있다. (2022421일 상황)

원덕사 미륵석불

원덕사 미륵석불, 과거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예나 지금이나 이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을 원덕리 미륵석불이 온갖 세파를 가슴에 품고 세상을 바라보고 서 있다.

원덕사 미륵석불을 보고, 왔던 길 300여 미터를 되돌아간다. 다시 안내표시판에 도착하면 왼쪽 저멀리 호남선 밑을 지나는 굴다리가 보인다. 굴다리를 통과하여 옛국도 1번도로를 따라 갈재정상으로 간다. 도로 왼쪽으로 호남선 철도, 오른쪽 높은 축대 위엔 새로난 1번국도다.

전일귀 효자비와 갈애바위(미인바위)

갈재정상을 향해 걷다보면 왼쪽 철도길 넘어 원덕사 미륵석불 뒷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가면 오른쪽 도로변에 전일귀 효자비석이 훼손된 상태로 서있다.(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이 비석 앞에서 제를 올렸다는 이유로 관군이 비석을 훼손했다함.)

효자 비석으로부터 약500미터, 변전소 부근에서 왔던 길을 돌아보면 왼쪽에 갈애바위가 보인다. 칼에 맞아 다친 한쪽 눈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 갈대)’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 갈애가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과 주변의 관리들을 현혹해 나라에서 엄벌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갈애바위’(미인바위). 사람들은 한 쪽 눈을 다친 갈애의 얼굴처럼 변한 갈애바위에 위령제를 지내주었다고 한다.<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이하곤(16771724) ‘남유록(南遊錄)’>

신목란마을에서 800여 미터, 갈재 옛길 들머리에 도착한다. ‘갈재길 종합안내도가 길가에 있다. 방향표시판이 없어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부근에 송전탑과 쉼터 정자가 있지만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수풀이 우거진 계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없었는지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수북이 쌓인 나뭇잎이 으스스하게 만든다. 나뭇잎이 두텁게 덮고 있지만 길은 넓고 잘 닦여 있다. 그러나 길가에 만들어 놓은 듯한 나무벤치는 대부분 썩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장성 갈재 넘으면최일환 시인의 시를 만나고 조금 더 가면 옹달샘을 만나게 된다.

동이 샘

길객의 오아시스 샘터동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태인 땅에 살고 있었던 동이는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동이에게 어떤 스님이 네가 살려면 장성 갈재 샘터로 가라고 말했다. 동이는 스님의 말에 따라 물어물어 갈재 샘터를 찾아왔다. 동이의 형색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때 마침 나주 부사로 부임하는 민돈중이 갈재샘터를 지나게 됐다. 민돈중은 동이를 서울로 데려왔다. 동이는 창덕궁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인현왕후도 구하고 자신도 숙빈이 돼 영조임금을 낳았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 쉼터 정자, 장성부사 홍병위의 영세불망비

갈재(276)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목란마을과 전북 정읍시 입암면 군령마을 사이에 있던 길이다. 서쪽의 방장산(742.8m)과 동쪽의 입암산(626m)사이 가장 낮은 부분을 넘고 있다.

노령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갈재(葛岾)는 문헌기록에 노령(蘆嶺), 위령(葦嶺), 적령(荻嶺) 등으로 표기되어 있고 갈대가 많은 고갯길이란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갈재 주변에는 갈대가 자라지 않는다.

1872년 지방지도_ 정읍현, 장성부 지도의 갈재(노령) 부근

노령(蘆嶺)의 이름은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족의 침략을 피해 나주로 피난할 때 넘었다는 기록으로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등장한다.
高麗史 4 世家 4 顯宗 2, 一月: 乙酉, 丹兵退. 丙戌, 王過仁義縣, 次水多驛. 丁亥, 蘆嶺, 入羅州. 乙未, 王回駕, 次伏龍驛. 戊戌, 次古阜郡.

高麗史 권 4 世家 권 4 顯宗 2 년 , 「 一月 」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乙酉日, 거란군이 물러갔다. 丙戌日, 왕이 仁義縣을 지나 水多驛에 들렀다. 丁亥日, 왕이 노령을 넘어 羅州로 들어갔다. 乙未日, 왕이 수레를 돌려 伏龍驛에 들렀다. 戊戌日, 古阜郡에 들렀다.

지금의 태인(泰仁)에 해당하는 인의현(仁義縣)을 지나 정읍으로 들어선 뒤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노령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井邑縣長城縣에 나타나며, 도적떼들이 들끓어 군사들을 산 밑에 두고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했다는 기록도 長城縣新增』【關防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新增東國輿地勝覽 34 全羅道, 井邑縣: <葦嶺> 葦或作, 在縣南三十里, 長城縣界, 又有小葦嶺, 在興德縣界.; 新增東國輿地勝覽 35 全羅道, 長城縣: <葦嶺>: 一云蘆嶺, 在縣北三十里, 要害之地. 新增』【關防葦嶺軍堡 嶺路幽阨盜賊群聚白晝殺掠行旅不通今 上十五年設堡防守

위령: 위는 혹 로 쓴다.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장성현의 경계이다. 小葦嶺이 있고 興德縣의 경계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全羅道, 井邑縣)
위령: 다른 말로는 노령이라고 한다. 현 북쪽 30리에 있고 要害의 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6 전라도, 長城縣)
정읍현의 노령보 고개 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대낮에도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개를 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중종 15년에 ()를 설치해 지켰다(防守)’라는 기록이 있다.

갈재 아래 군령마을은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 곳이다.

金正浩大東地志에서 蘆嶺堡에 대해 설명하며 중종 15(1520)에 보를 설치했다가 폐지했다고 하였다.

金正浩 , 大東地志 권 11 全羅道 [ 號湖南 ], 「 井邑 」 : < 防守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金正浩, 大東地志 11 全羅道[號湖南], 「井邑」: <防守> 蘆嶺堡: 嶺路幽阨, 舊時盜賊群聚, 白晝殺掠, 行旅不通, 中宗十五年, 設堡防守, 後廢.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李重煥擇里志는 실학파 학풍의 배경에서 만들어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리책이다. 택리지 八道總論全羅道에 언급된 노령의 내용을 보면, 남북을 오가는 데 이용하는 큰 길이라고 하였고, 노령을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의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다.

택리지, 필사본,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李重煥, 擇里志 八道總論, 全羅道: 一西南爲淳昌復興山, 爲井邑蘆嶺, 是爲南北通行大路;
蘆嶺以北十餘邑, 皆有瘴;
蘆嶺之西爲靈光咸平務安, 南爲長城羅州, 此五邑則水泉無瘴, 不比.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가다가 순창의 복흥산과 정읍의 노령이 되었는데, 여기가 남쪽으로 통하는 큰 길이다. 노령 북쪽에 있는 십여 개의 고을은 모두 장기가 있다. 노령 서쪽은 영광·함평·무안이고 남쪽은 장성과 나주다. 이 다섯 고을은 샘물에 장기가 없으니 노령 북쪽의 여러 고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노령을 기준으로 지역을 구분 하거나, 농사 상황, 가뭄, 태풍피해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양을 떠나 임지로 부임하던 관리도 넘었고, 봇짐장수도 넘었고, 강진이나 완도,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귀양길의 선비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도 1894년 동학농민군도 넘었다. 고갯길 정상에는 장성 부사 홍병위를 기억하기 위해 새겨놓은 불망비(不忘碑·1872)가 남아 있다. 갈재 옛길이 장성부사가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입암면사무소 근처에 남아 있는 천원역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해남대로를 오가던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숙소와 음식, 그리고 말들을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천원차(川原茶) 생산지, 김시습이 이곳을 지나다 누각에 올라 시 한편을 남겼다고 한다.

김시습 시와 천원역터

언덕 펀펀하고 먼 나무가 그럴듯한데 / 희미하게 인가에 접해 있구나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 산이 낮아 차(茶)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이 암담한데 / 능악 묏부리가 뾰족하구나
강호의 경치를 수습하고서 / 올라가니 해가 반쯤 기울었더라.

일제강점기에 천원차는 일본인(오가와)1913년부터 개간을 하고 1923년부터 생산하여 전량 일본으로 가져갔다.

장성 쪽에는 지금의 장성호 일원에 청암역(靑巖驛)이 있었다고 한다. ‘1872 지방지도 장성부청암도가 그려져 있는데 상당한 규모이다.

청암도는 조선시대 전라도 나주에 있던 청암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역로이며,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 있던 전라병영으로 통하는 역로까지 관할했다. 조선 초기, 중심이 되는 찰방역은 나주의 청암역이었으나 조선 후기 들어 장성에 있는 단암역으로 이전하면서 단암역이 청암역으로 변경되었다. 대체로 서해에 접한 전라남도 서부의 평야지대를 연결하던 역로를 역로를 관할했다. 청암도에는 장성의 청암역(靑巖驛)을 중심으로 영신역(永申驛)선암역(仙巖驛)신안역(申安驛)녹사역(綠沙驛)가리역(加里驛)영보역(永保驛)경신역(景申驛)광리역(光利驛)오림역(烏林驛)청송역(淸松驛) 등으로 편성되었다. 청암도는 1896년(고종 33)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청암도에 속한 11개 역(좌), 1872년 지방지도 장성부 지도의 청암도(우)




*역원 驛院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을 역이라 하고, 주요 도로에 대개 30리마다 두었다.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원이라 했다.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한 관련하에 설치되기 때문에 흔히 역원이라 일컬었다.

*삼남대로
한양에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으로 가는 길로, 삼례-전주-태인-정읍-나주-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약 970리 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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