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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서울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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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2012. 12.28 촬영)
조선시대에 서울에 설치한 유학교육기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전묘후학의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앞쪽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뒷편에 위치)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신라시대의 국학(國學), 그리고 멀리는 고구려의 태학(太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 나라 최고학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3년 만에 대성전과 동무(東廡)·서무(西廡)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정록소(正錄所)·식당·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① 생원과 진사, ② 사학생도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 및 사서(四書)와 오경 중 1경에 통한 자, ③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통한 자, ④ 문과 및 생원·진사시의 초시인 한성시(漢城試)와 향시(鄕試)에 합격한 자 ⑤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나누어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균관(成均館))]

성균관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탕평비와 하마비를 만난다.
탕평비는 1742년(영조18) 붕당정치의 폐해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치의 올바른 길을 알려주려는 뜻에서 세워진 비석이다. 하마비의 전면에는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쓰여있다.

신삼문은 대성전 남쪽의 3간의 문으로 성현들의 신이 드나드는 문.
동삼문은 임금이 성균관 문묘를 출입할 때 사용하는 문.

명륜당 앞 은행나무, 공부자(孔夫子)의 교육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 심었다 한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유교의 상징이 되어 성균관과 향교에는 은행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속설에는 은행나무가 벌레를 잘 타지않는 것처럼 유혹에 빠지지말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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