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지리답사/전남

전남 순천 낙안읍성

 

360 VR파노라마 보기, 사진 클릭

 

고려 중기를 지나면서 지방 도시의 중심이 산성 밑 또는 완전 평지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르면 일반화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배산임수의 입지가 많지 않았으며, 특히 풍수는 지방 도시 입지의 중요한 논리가 되지 않았다.

 

1360년대부터 경상도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성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해자가 갖추어지지 못해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방어하기 어려운 평지 또는 평지+산지에 걸친 '한국적' 읍성이 자발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후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왜적과 홍건적의 침입에 대한 산성방어론과 읍성방어론이 논쟁을 겪다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때부터  읍성방어론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때부터 그동안 고을의 중심지 또는 중심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던 산성은 고적으로 취급되기 시작하며, 국가가 적극적 관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 해안 고을을 중심으로 읍성을 대대적으로 축조한다. 이와 같은 방향 전환 속에서 국가는 조선의 지방도시인 읍치의 조영에 '조선적'인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낸다.

 

세종 때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읍성의 위치 선정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였는데, 중앙에서 전문가가 직접 파견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읍치의 입지 선택에 가장 중요한 논리가 된 것은 한양에 적용되었던 풍수였다. 예를 들어 전라도 낙안 읍성의 경우 1424년에 처음으로 축조되는데, 입지 선택에 중앙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원래 낙안군의 중심지가 있었던 현재의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풍수적 입지에 적합한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지역으로 읍치를 옮긴다. 또한 낙안읍성의 간선도로망과 상징 경관 역시 수도인 한양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만든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가장 중요한 낙안읍성의 남문에서 시작되는 남북 도로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동서 도로와 만난 후 서쪽으로 꺾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 바라 보아야만 한양의 경복궁에 해당되는 낙안의 동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바라본 상징 경관이 하늘=산=동헌이라는 일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세종로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하늘=산=경복궁의 경관과 동일한 것이다. 나아가 주변의 산줄기 역시 풍수적으로 합당한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낙안읍성의 남북축 역시 주산-안산의 방향과 일치시키기 위해 정남이 아니라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종 이후 축조된 읍성 대부분에서 나타났으며, 읍성이 축조되지 않은 상당수 고을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출처: 한국 역사 지리, 544~545,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엮음. 이준선 외 지음>

 

 

1397년(태조 6)에 고려 후기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세종실록』에는 1424년(세종 6) 9월부터 성벽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원래의 규모보다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의 긴 장방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문은 악풍루(樂豐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鎭南樓), 서문은 악추문(樂秋門) 등으로 불렸는데 터만 남아 있을 뿐이고,
옹성은 남문터와 서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전하는 기록대로 동문터 좌우와 동북쪽·동남쪽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성벽의 둘레는 1.385㎞이다. 동문터의 남쪽 부분이 가장 잘 남았는데, 높이는 4.2m이고, 위쪽 너비와 아래쪽 너비는 각각 3∼4m, 7∼8m이다.
아래쪽에 커다란 깬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한국지리답사 > 전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등산 주상절리  (0) 2022.03.22
전남 여수의 사도와 추도  (0) 2021.09.24
운주사 천불천탑  (0) 2020.05.07
조광조 유배지  (0) 2012.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