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 호벌치와 코무덤

Posted by 지오VR
2015.10.04 20:32 한국지리답사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비와 코무덤, 민충사, 타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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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호벌치 전적비(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는 정유재란(1597)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선현들의 넋이 서린 곳이다.

임진왜란에서 패한 왜군이 의병들과 군량미 등 군수물자의 보급창이었던 호남을 그냥 두고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라도로 쳐들어왔다.

서해안을 휩쓸고 다니며 살육과 방화 약탈을 하는 왜군을 맞아 싸운 싸움의 하나가 호벌치 싸움이다.

호벌치는 변산의 한줄기가 고부평야로 향해 뻗어 내린 등성이의 고개로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목이요 요충지이다. 

 

되놈을 물리친 재라는 뜻으로 왜벌치, 적치, 호치(된재)라 부르기도 하며,또한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와 주류성일대 통수부를 설치하였다 하여 생긴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왜적이 줄포만을 거쳐 부안읍에 쳐들어오자, 채홍국은 김영년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싸움을 벌였으나 적의 급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그러자 그의 두 아들, 명달과 경달도 나라를 구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에 뛰어 들었으나 그들 역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당시 이들과 함께 산화한 의병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5년 8월, 이 곳에 전적비와 함께 순절비를 세웠다. 호벌치 싸움의 전황은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 호남도지, 겁암일기 등에 전해지고 있으나, 싸움 시기가 4개월이나 맞지 않아 좀 더 깊이있는 연구가 있어야할 것 같다.


코무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의병으로 인해 전라도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왜군은 정유재란(1597) 때 전라도에 들어와 잔인무도하게 양민을 학살하였다.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은 부하 장수들에게 전공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오라고 했다. 이때 귀ㆍ코를 베어가는 사람을 ‘이비야(耳鼻爺)’라고 했다. 이(耳)는 귀, 비(鼻)는 코, 야(爺)는 남자를 가리킨다. 


이비야(耳鼻爺)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일본 승려 경념(慶念)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나온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 일기에 의하면 들도 산도 섬도 모두 불태우고, 사람마저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는 자식 걱정에 발을 구르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본다고 했다. 

 

세상인심이 각박할 때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 하고, 어린애들에게 겁주기나 위험한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할 때 ‘이비’ ‘애비’ ‘이비야’ 하는 소리를 종종 한다. 이는 정유재란 이후 만들어진 말로 추측된다.


호벌치 전적지에는 코무덤이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 성주, 로고스게도 역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여서 포상을 받지 못하 고 코는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었으나, 영혼의 존재를 신봉한 로고스게는 고향 야산에 조선인의 코무덤을 만들고, 용서를 빌었고, 죽음에 앞서 유언에도 영혼들과 같이 묻어 달라며 사죄 뜻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 400여년간 제사가 치루어졌다고 한다. 이곳 호벌치의 코무덤은 1993년 11월 26일 오카야먀의 코무덤에서 흙을 담아와 호벌치에 묻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 인터넷상에 자료는 있는데, 부안군지와 호벌치 안내판에는 코무덤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왜? 오카야마현 코무덤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것 때문일까?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민충사는 호벌치 순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2007년에 착공해 2009년에 완공되었다. (145위 위패와 무명의사 1위, 합계146위 위패)


 

 

타루비

 

1592년 임진왜란에서 패한 왜군이 조선 선조 30년 다시 쳐들어와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자 도화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이유 선생이 의병을 모아 청등에서 적과 싸우다 순국하니 그 갸륵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유 선생은 함평인으로 1545년 조선 인종1년에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학문에 힘쓴 선비로, 임진왜란의 국란에는 의병장 고경명, 조헌, 김천일에게 군량과 군기를 보내 지원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이 서해안을 따라 부안으로 쳐들어오자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문하생과 함께 이곳 청등벌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적의 총탄에 전사하고 생을 마치니 선생의 나이 53세였다. 부인 부안 김씨는 이 소식을 듣고 병졸들을 이끌고 죽창으로 무장하고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싸우다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는데 두분의 시체를 걷우지 못한 그 제자들이 그분들의 신발과 의복만으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고을 사람들은 선생의 학덕과 충성심 그리고 부인의 충렬의 미덕을 추모하여 타루비를 세워 후세에 귀감으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없어진 것을 1981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타루비는 옛날 중국 진(晉)나라 양양태수 양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백성들이 그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두예가 붙인 이름이다.

또한 이태백의 시 '누역불능위지타 삼역불능위지애'에서 원용한 것으로 애절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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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수도 티라나

Posted by 지오VR
2015.09.13 14:30 세계지리답사/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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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시간 전 잠깐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중앙대로를 산책하였다. 호텔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타이완 광장, 이글루 모양의 벙커, 그리고 호자의 딸이 지었다는 피라미드 건물, 너무 한적한 대통령궁, 마더 테레사 광장, 알바니아 정치대학 등...

 

 

<사진 출처: 구글 검색>

첫 번 째로 발길이 멈춘 곳은 이글루 모양의 벙커,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국회사이, 중앙대로와 이스마일 Qemali 거리의 코너에 위치하고 있다. 벙커는 엔버 호자시대에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하자 알바니아는 바르샤뱌 조약에서 탈퇴하고 자체 방어 정책으로 전국 곳곳에 75만개의 벙커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이스마일 케말리(알바니아 독립운동가)동상, SPAC 수용소(알바니아 공산주의 정치적 감옥)의 콘크리트 기둥과 베를린 장벽의 조각을 갖추고 있었다.

 

* 호자(1908~1985) : 알바니아 민족해방전선, 알바니아 공산당 창건,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당 노동당 총서기, 독재자, 폐쇄정치, 무신론 국가 선언

 

 

베를린 장벽의 조각 -촬영 이수현-             이스마일 케말리(알바니아 독립운동가) -촬영 이수현-

                                                                                                               

바로 옆에 소박하게 보이는 대통령궁, 1928년부터 10년 동안 들어섰던 알바니아 왕국의 아호메트 조그1세가 왕궁으로 쓰려고 짓다가 2차대전 때 점령군으로 온 이탈리아군에게 폐위 돼 쫓겨난 뒤 이탈리아 총독 관저로 쓰였다고 한다. 문패(?)도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무슨 건물일까 궁금할 정도로 평범한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피라미드 건물은 Enver Hoxha의 딸의 디자인에 따라 1987년에 호자의 기념 박물관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이 건물 앞에서 연설을 했던 곳이고, 현재는 TV 방송국으로 사용하다가 버려진 건물이다. 외관의 대부분은 유리 파손, 낙서가 가득한 벽면, 진입로의 깨진 보도블럭, 흉물로 남아있었다.

 

 

 

에템베이 모스크(Mosque of Ethem Bey)
터키 지배 시절 1789년 몰라 베이에 의해 시작되어 1823년 그의 아들 에템 베이에 의해 완공되어 그의 이름을 따왔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공산주의 시절에는 폐쇄되었다가 1991년 공산당이 몰락한 후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바니아는 1967년 세계 최초로 공식 무신론 국가 선언을 했었다. 당시 독재가 엔베르 호자의 명령으로 모든 교회와 모스크가 파괴되거나 운동경기장이나 창고 같은 시설로 개조되었다. 실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었다. 어느 모스크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이곳에는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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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크루예

Posted by 지오VR
2015.09.12 20:51 세계지리답사/알바니아

크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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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에 도착해서 첫 답사지는 크루예(Krujë, 크루야: Kruja)다. 알바니아어로 "샘"을 뜻한다고 한다. 수도 티아라에서 북쪽으로 공항을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 밖 멀리 산등성이에 도시가 보였다. 나는 그 곳이 크루예임을 직감하고 주변에 있는 일행들에게 말했는데, 대부분 미심쩍은 얼굴이다. 무슨 근거로? 마케도니아에서 온 가이드조차 반응이 별로다.


내가 '크루예'라고 단정적으로 말한 이유는, 답사 출발하기 전, 크루예의 위치를 구글어스로 파악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북서방향으로 발달한 산지와 확연히 드러나는 단층선 그리고 크루예의 배경이 되고있는 대략 1150m 높이의 산과 여기 저기 파헤쳐진 큰 구덩이... 난 그 구덩이를 석회암 광산으로 추정하였고, 부근에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멘트 공장을 찾아보았는데, 상당한 규모의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 석회암이 나타나리라 추정한 이유는 ‘카르스트’ 용어와 알바니아의 ‘알바’의 유래 때문이다. 



         


카르스트라는 말은 슬로베니아의 크라스(Kras) 지방의 독일어 명칭이다. 이 지방에는 중생대에 형성된 석회암이 두텁게 분포하여, 용식에 의한 지형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가 최초로 진행되어, 후에 같은 종류의 지형을 나타내는 통칭으로서 ‘카르스트’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발칸반도 북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로부터 이곳까지 디나르알프스산맥의 연장선이다. 이곳도 석회암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알바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리스까지 가는 여정 속에서 석회암은 계속 볼 수 있었다.


 

 알바니아의 ‘알바’는 라틴어의 ‘하얀’과 관계가 있고, 로마인들이 일찍이 석회암 지대가 많아서 ‘하얀 나라’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알바니아가 되었다고 설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이와 연관시켜, 내가 대단한 지리학자인양 잘난 체 했던 것인데... 현지 운전기사의 시멘트 공장이 있다는 발언이 있고나서야 나의 말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크루예 뒤쪽의 산체는 아침 안개로 흐릿하지만 분명 하얗게 보였다. 그리고 크루예에서 하루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인 모습은 석양의 햇빛을 받아 확연하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크루예는 1190년 알바니아인이 최초로 세운 민족 국가인 아르버르 공국(1190년 ~ 1255년)의 수도였으며 그 뒤에는 중세 알바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지만 1443년부터 1468년까지는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 장군이 지배하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수십차례 물리친 역사적인 장소이다.


스칸데르베그 박물관

 스칸데르베그 장군은 중세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이다. 북알바니아의 호족 기온 카스트리오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430년경, 부친이 오스만제국의 종주권을 받아 들였으므로 당시의 관습에 따라 형들과 함께 오스만 궁정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 곳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시종으로서 근무하였다. 무용(武勇)이 뛰어난다는 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과 관련된 스칸데르라는 이름을 수여받았으며 군사령관(베그)으로서 종군하였다. 그는 1437년경 아버지의 영지 티마르(timār, 군사봉토)를 수여받고 시파히(기사)로서 고향에 돌아왔다.

 1443년 오스만제국군이 헝가리의 민족영웅 프냐디·야노슈와의 분쟁을 틈타서 민족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하여 북알바니아를 통일하였다. 이후 25년 간, 나폴리 왕국, 로마 교황, 베네치아 등의 원조도 얻어, 오스만제국군으로부터 국토를 지켰다. 1468년에 그가 병사하자, 알바니아는 다시 오스만제국에 합병되었으나 그의 저항정신은 민중 사이에 전해졌다.

 19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사상이 높아지자,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으로서 서사시와 전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알바니아 국민문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나임·프라샤리의 『스칸데르베그의 이야기』(1896)와 팬·노리의 『스칸데르베그의 역사』(1921)는 알바니아인의 통합에 큰 역할을 했다.





알바니아는 알바니아어로 슈치퍼리아(Shqipëria), 슈치프는 독수리를 의미한다. 알바니아 국기에는 독수리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스스로 독수리의 후손이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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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페 walking tour

Posted by 지오VR
2015.09.06 03:19 세계지리답사/마케도니아

스코페 walking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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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페에 도착해서 첫 방문지는 테레사수녀 기념관이었는데, 테레사수녀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돌다리와 광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위 사진 돌다리(Stone Bridge)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만들고, 오스만제국 때 재건립 되었다고한다. 시내 번화가와 구시가지를 연결한다. 


스코페는 1963년에 1070명의 사망자와 12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내고 시의 약 80%를 폐허로 만들었던 강한 지진이 일어난 후 시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여러 개의 위성 주거지역과 4개의 공업지역을 갖추고 지진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도시계획이 구상되어 구시가지 쪽 바르다르 가에는 마케도니아 대의기구가 들어 있는 건물과 교육기관, 도서관, 텔레비전 방송국 등이 들어서게 되었고, 신시가지 쪽은 경제 및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재건 후 현대적 건물이 많아졌고 시내에는 로마 시대의 수도, 성채, 성당 등이 남아 있다. 재건 과정에서 이 도시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강한 투르크적인 면모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돌다리 아래 쪽에 막 다이빙하려는 여자와 물속으로 막 들어간 사람의 발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무슨 의미일까?  

스코페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한 시민은 해마다 이곳에서 바르다르강에 십자가를 던져 제일 먼저 건져오는 사람이 우승하는 행사가 있는데 그것을 재현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고보니 오흐리드 호수가에 수영복입고 십자가를 들고 있던 남자 조각상이 생각난다. 이름도 만든 사람도 알 수 없는 조형물, 해석의 자유로움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돌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간다. 가는 길에 만난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 흔쾌히 사진을 같이 찍어준다. 구시가지에는 사람들의 삶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바자르가 있다. 바자르 골목에는 15세기중반(1452)에 지어진 Kapan Han(대상 숙소)가 있었는데 손님과 상인을 위한 44개의 객실을 갖추고, 말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는 전통적인 마케도니아어 음식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Kapan Han을 빠져나와 찾은 곳은 Čifte_Hammam(마케도니아어 : Чифте-амам), 공중 목욕탕이다. 15세기에 지어진 공중 목욕탕은 남성, 여성 룸이 각각 떨어져 있다고 들은 것 같다. 2001년부터 마케도니아의 국립 미술관의 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들어가보지 않았다.


바자르를 빠져나와 스코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칼레요새로 가는 도중 무라트 파샤 모스크와 정교회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장 아름답다는 모스크는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17 또는 18 세기 초에 지어진 church of Holly Saviour를 들어갔다. 종탑과 석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닥의 대리석 장식문양은 소박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였다. 프레스코와 iconostasis의 아름다움이 놀랍다고 하는데 실내로 들어갈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건물 아래 쪽 벽에 십자가는 성직자의 묘라는 설명을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칼레요새는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의 도시 스쿠피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재건하고 10세기에서 11세기사이에 확대 건설하여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1963년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졌다. 2006년 말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기원전 3000년경에 사용했던 목관악기와 찰흙 장식품등이 발견되었고 요새 밑에선 집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

스코페 광장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동상이 있었다. 분명 마케도니아 역사와 관련있는 인물일텐데 기억에 남는 건 알렉산더 대왕 동상이다. 

광장은 지금도 조성중이었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는 역시 어린이들의 놀이터, 분수가 개장(?)된 걸 처음 본다는 동행한 한인회장님, 마케도니아는 계속 아주 빠르게 관광사업에 매진중임을 알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에는 한국인이 11명(2015년 현재), 4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와 우리나라는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는 그리스와의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을 두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서로 자신의 조상이라고 맞서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모습을 본뜬 초대형 동상이 마케도니아에 세워져 있다. 대놓고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동상은 누가 봐도 애마 부세팔루스를 탄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서 주조된 채 공수돼 조립되는 이 동상은 22m(발판 10m 포함) 높이의 초대형 크기로, 건립 비용만 530만유로(83억원)에 이른다. 평균 월 임금이 440달러에 불과한 마케도니아로서는 상당한 비용 지급을 감수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마케도니아 안에선 니콜라 그루에프스키 총리가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괜한 민족주의를 조장해 그리스와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나올 정도다. 


알렉산더 동상 건립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둘러싼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양국 간의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가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제정하면서, 그리스와의 마찰이 시작됐다. 그리스 정부와 학계는 동상건립에 대해 마케도니아가 자국의 역사유산을 가로채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유고연방 붕괴 후 그리스 북부지역 명칭인 마케도니아와 똑같은 이름을 국호로 도용하더니 이제는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역사까지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는 외교적으로는 ‘마케도니아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케도니아가 테살로니키 동상보다 훨씬 웅장한 알렉산더 대왕 동상 건립으로 역사논쟁에 쐐기를 박으려 하고 있다. 


스코페

바르다르강(Vardar R.)상류에 위치해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 사이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로 마케도니아 인구의 25%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도시명칭은 1912년 우스쿠브(Uskub)에서 스코플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페(Skopje)로 불리었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해왔으며, 이러한 흔적들은 오래된 칼레(Kale)요새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대 일리리아족의 중심지였던 스쿠피에서 비롯된 스코페는 4세기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다르다니아 지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518년에는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7세기에는 슬라브족에게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9~10세기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1189년 세르비아인들이 처음으로 이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1392년 투르크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이 시를 지역 중심지로 삼아 상업요지로 만들었지만 1689년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진성 콜레라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 시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19세기에 베오그라드-살로니카(그리스) 간 철도가 건설되면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조약에 따라 1913년 세르비아에 합병되게 되었고 1918년에는 신생국인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1941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인들에게 점령당했고 그 후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주둔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4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 통합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서 독립되면서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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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흐리드 투어

Posted by 지오VR
2015.09.02 00:27 세계지리답사/마케도니아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사진을 클릭하시 오흐리드의 14지역을 360도 VR투어하실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오흐리드호(湖)의 북동쪽 연안에 있다. 9세기 후반에 불가리아인에게 정복되어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宣敎)의 거점이 되었다. 중기 이후의 비잔틴 미술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마케도니아 주요 휴양지의 하나이며, 고기잡이와 자동차부품·진주가공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10~11세기에 축성한 요새의 잔해가 남아 있으며, 성소피아 대성당(11세기)·성클레멘스 성당(1295) 등 많은 성당이 있으나, 오스만 제국 통치시대(1398~1912)에 대부분 이슬람교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철도·고속도로·항공망을 통해 스코페와 연결된다.

 

마케도니아 역사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세계를 정복했던 때부터)의 대부분은 오늘날 그리스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마케도니아가 사용하는 국명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항상 논란을 제기한다. 로마인이 고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을 기원전 2세기중반에 정복했었고, 기원4세기 로마제국이 분열할 때 이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배하는 동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슬라브족은 이곳에 7세기에 정착하여 이 지역의 민족성을 바꾸어버린다.
이 지역은 9세기 불가리아인 짜르 시메온(tsar Simeon)에 의해 점령당한다. 그 후 짜르 사무엘(Samuel)의 지배하에서 마케도니아는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의 중심이 된다. 1014년 사무엘이 비잔틴제국에 패배함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비잔틴제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국가에 의해 번갈아 지배되는 긴 세월이 시작되었다. 1389년 터키가 세르비아에 대승하여 발칸국가들은 오토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역문화 또한 변하였다.


1878년 러시아는 터키를 패배시킨 후,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이양한다.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중심에 그들의 강력한 기지를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서방 강대국들은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를 터키에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1893년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로부터 독립투쟁을 위해 마케도니아 내 혁명기구(IMRO: 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sation)를 조직하며, 1903년 5월 일린덴(Ilinde) 봉기로 투쟁의 절정을 이룬다. 이 후 3개월 동안 잔인하게 억압 당한다. 민족지도자였던 고체 델체프(Goce Delcev)는 반란이전에 죽었지만 그는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연합하여 터키에 대항했던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때는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배척하고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다. 이런 결과에 실망한 IMRO는 세르비아 왕권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에 대해 베오그라드의 전시정부는, 마케도니아 언어는 물론 마케도니아란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응한다. 일부 IMRO 요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가리아의 점령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티토의 빨치산에 가담하다. 전쟁 후 마케도니아는 미래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완전한 공화국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것에 1943년 동의한다. 1952년 최초로 마케도니아 문법이 출판되었고 독자적인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마케도니아인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종집단이라는 것을 인식한 베오그라드 정부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불가리아의 요구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91년 9월 8일 마케도니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 74%가 독립을 원하였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정부는 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처음 베오그라드는 마케도니아 주둔 연방군대를 철수하도록 협조를 했고, 분할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도로와 철로 등이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중반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지대, 특히 잠재적인 화약고인 코소보와 가까운 지대를 감시할 목적으로 천 여명의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은 그리스북부 지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국명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마케도니아의 외교적 승인을 미루었다. 그리스는 만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란 국명을 사용하면, 그들이 오늘날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대 마케도니아 영토에 대한 권리의 실질적인 합법성을 마케도니아인들이 제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정부의 지속적인 입장에 따라, 마케도니아는 하는 수 없이 1993년 4월, '잠정적으로'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YROM)이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유엔이 재가해 줄 것을 신청한다.
 2년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1993년 12월, 강한 그리스의 반대가 있었지만 유럽연합의 6개국과 외교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1994년 2월 미국도 FYROM를 인정한다. 그러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경제통상 금지를 선언하고 마케도니아와의 무역항인 테살로니키 항구를 폐쇄한다. 마케도니아가 국기를 바꾸고 국호에 관해 그리스와 협의에 들어 간다는 동의를 한 후인 1995년 11월 통상금지령은 철회된다. 곧 이어 협의가 시작되었으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이 차량폭발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지금까지 이 난제 해결을 위한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코소보사태를 기억한다. 1999년 3월부터 6월까지 계속되었던 나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코소보 폭격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피난처를 찾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로 넘쳐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분쟁을 한번에 종식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의 군부대를 폭격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난에 허덕이는 마케도니아에 수십만의 난민이 들어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많이 쓰이는 키릴문자는 테살로니키 출신의 두 형제 성 키릴(St Cyril)과 성 메토디우스(St Methodius)에 의해 9세기에 개발된 알파베트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 문자는 오흐리드의 한 수도원에서 규율을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동 슬라브를 거쳐 전파되었다. 거리이름은 키릴문자로만 쓰여져 있고, 도로표시는 키릴과 라틴어 모두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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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산 암괴류(block stream)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Posted by 지오VR
2015.08.30 13:42 한국지리답사

만어산 암괴류(block stream)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360도 VR파노라마 보기 사진 클릭<5곳 촬영>


만어산 암괴류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가보지 못해 지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꼭 한번은 가야되는 곳처럼 암괴류가 나를 괴롭혔습니다. 토요일 아침 가볍게 어딘가 바람쇠러 가야지 하고 나온 것이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에 있는 만어사, 전주에서 고속도로로 달려서 4시간, 자동차 운전 왕복 8시간, 상당히 피곤하고 힘든 곳인데 어찌된 일인지 훌쩍 갔다 왔습니다.


만어산(670)의 고도 350m~500m 산사면을 따라 암괴들이 쌓여있습니다. 길이 450m, 폭 40~110m, 두께 0.3~6m이며, 경사는 10~15도 내외이며, 암괴의 암석은 세립질 화강섬록암, 반려암으로 화강암류입니다.


우리나라 산지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너덜겅(암괴류의 우리말, 너덜지대, 돌강, 애추, block stream)입니다. 산비탈에 돌무더기가 산사태가 난 것처럼 너부러져있습니다. 만어산의 너덜겅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우선 이 곳의 암괴류는 지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곳의 암괴류는 풍화를 받아 거무튀튀한 색에 모서리까지 둥글둥글하니 아마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형을 화석지형이라 하는데. 대체 언제 형성되었을까요? 아마도 이런 규모의 암괴류가 만들어지려면 기계적 풍화작용이 일어나기에 탁월한 기후조건이 필요한데, 우선 빙기를 생각할 수 있겠네요. 적어도 신생대 제3기말부터인 300~400만전, 이 지역의 기반암을 이루고 있는 화성암 계열의 화강암질 암류가 고온 다습한 간빙기에 이르러 심층풍화작용을 활발히 받은 결과 새프롤라이트와 다량의 핵석을 만들었고, 한반도가 주빙하기와 후빙기로 접어들면서 많은 비를 내리는 기후환경으로 변해 새프롤라이트가 점차 골짜기 하부로 이동, 운반되었을 겁니다. 그 결과 만어사 앞에는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암괴류가 형성되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곳 만어사의 너덜바위의 형성시기는 대략 3만년 전쯤인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 돌도 아주 오랫동안 지표상에 노출되면 푸석푸석하에 썩어 없어집니다. 이것을 풍화라고 부릅니다. 일교차나 연교차가 큰 기후에서 잘 일어납니다.(기온의 변동에 따른 암석의 수축과 팽창, 서릿발 작용, 식물뿌리의 성장 등) 서릿발 작용은 보리밟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릿발이 흙과 돌을 들어올려 보리 뿌리가 얼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리밟기를 하죠..^^. 새프롤라이트는 풍화토라고 하는데 돌이 썩으면 겉으로는 바위처럼 보이나 속은 푸석푸석한 흙으로 된, 즉 돌처럼 보이는 흙을 말합니다.<박종관 교수의 lET'S GO 지리여행>






아래 글은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전영권 교수가 ‘과학동아(2003년 9월호,바로가기 클릭)에 쓴 글입니다. 너덜겅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강암 부서져 만들어진 푸석바위

돌강이라는 용어는 돌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돌강의 정확한 명칭은 ‘암괴류’(block stream). 하지만 필자도 일본식 한자어인 암괴류보다는 우리 정서에 더 맞는 것 같아 돌강 또는 바위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주인공은 화강암이다. 그렇다면 화강암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돌강이 만들어지는 것일까.지각이나 맨틀의 상부에 있던 용융 상태의 마그마가 위로 올라오면서 식으면 굳어져 화강암이 형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강암이 점점 더 지표 가까이로 올라오면 위에서 누르는 큰 압력이 줄어들어 팽창한다. 이 과정에서 화강암 표면에 수직 또는 수평으로 균열된 틈이 많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절리’(joint)다. 여기에 수분이 스며들면 암석이 부서진다. 이 과정을 심층풍화 또는 지중풍화라고 한다. 땅 속에서 진행되는 풍화작용이라는 뜻이다.풍화가 시작되면 암석의 모서리가 점점 깎여 나중에는 둥근 돌이 된다. 이것을 ‘돌알’(핵석, core stone)이라고 한다. 또한 거의 부스러진 상태의 작은 모래 또는 진흙 덩어리도 형성되는데, 이는 ‘푸석바위’(석비레, saprolite)라고 부른다(그림 1).


 


(그림1) 돌알, 푸석바위, 탑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


돌알과 푸석바위는 화강암 산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설악산의 흔들바위와 비슬산 돌강을 이루고 있는 돌은 모두 돌알이다. 그렇다면 돌알과 푸석바위가 어떻게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장관을 연출하게 됐을까.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수백만년-1만년 전은 빙하기, 즉 1년 중 가장 따뜻한 달의 평균기온이 영하이며, 물이 항상 얼음 상태로 존재하는 기후였다. 특히 마지막 빙하기였던 8만년-1만년 전의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보통의 빙하기후보다는 기온이 조금 높아 0℃를 오르내렸다. 이런 기후를 ‘주(周)빙하기후’라고 한다. 현재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미국의 알래스카 등지에서 나타나는 툰드라 지역이 주빙하기후에 해당된다. 이곳은 대체로 연중 9개월 이상은 기온이 영하, 3개월 이하는 영상이다.


0℃ 오르내리던 기후 때 형성

돌강은 마지막 빙하기 동안의 주빙하기후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기온이 영하에서 영상으로 올라가면 얼어 있던 지층 중 지표에 가까운 부분은 녹아서 마치 밀가루반죽처럼 유연한 상태로 변한다. 이런 상태의 지층을 ‘활동층’이라고 한다. 활동층 아래에는 연중 녹지 않고 얼어 있는 지층(영구동토층)이나 풍화를 받지 않은 신선한 상태의 바위층(기반암층), 물이 통과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치밀한 층(불투수층)이 있다. 이런 단단하고 치밀한 지층에는 수분이 잘 스며들지 않는다. 따라서 수분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활동층이 유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푸석바위와 돌알로 구성된 활동층은 약간의 경사만 있어도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쪽으로 이동한다. 이런 현상을 ‘솔리플럭션’(solifluction)이라고 한다. 산지 곳곳에서 형성된 활동층은 계곡 쪽으로 연간 수-수십cm 정도로 서서히 이동한다. 그러다가 빙하기가 끝나면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멈추게 된다. 그후 비가 와서 이런 지형들 사이로 물이 흐르게 되면 모래나 진흙과 같은 작은 물질들은 씻겨 내려간다. 따라서 무겁고 큰 돌만 남아 마치 강물처럼 흘러 내려가는 모습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돌강으로는 비슬산 돌강과 더불어 경남 삼랑진 만어산 돌강(길이 1km, 경사 15°)과 부산 금정산 돌강(길이 0.8km, 경사 14°)이 있다. 특히 만어산 돌강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만어산 근처는 먼 옛날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던 바다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바다가 육지로 변하면서 물고기들이 모두 바위로 변해버렸다. 그후 고려 때 이곳에 절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있는 절’이라는 뜻의 만어사(萬魚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최대 폭 약 1백20m, 길이 약 1km에 달하는 만어사 돌강의 거대한 바위들 중 어떤 것은 두드리면 목탁소리나 종소리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영험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화강암 속에 들어 있는 광물 성분의 구성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소리라고 판단된다.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등지에도 돌강이 발달해 있다. 영국 다트무어에 길이 0.9km, 경사 7° 규모의 돌강이 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지역에도 길이 0.8km, 경사 22°인 돌강이 형성돼 있다. 비슬산 돌강은 그 길이가 약 2km에 달해 경사가 15°인 돌강 중 세계에서 최대규모다.


돌강엔 둥근 돌, 너덜지대엔 각진 돌 




(그림2) 돌강이 형성되는 과정


한편 경사가 없는 지층에서는 푸석바위가 제거되고 나면 돌알들이 풍화되지 않은 기반암이나 다른 돌알 위에 그대로 탑처럼 쌓인다. 이를 ‘탑바위’(토르, tor)라고 부른다. 토르라는 말은 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영국 남서부 콘월 지방의 토속어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 매화산, 속리산, 팔공산 등지의 탑바위가 잘 알려져 있다. 비슬산 돌강이 시작되는 정상부 일대에도 부처바위, 곰바위, 형제바위, 스님바위, 기도바위, 코끼리바위, 상감모자바위 등 무수히 많은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있다. 설악산의 흔들바위도 거대한 바위 위에 돌알인 흔들바위가 놓여 있으므로 일종의 탑바위다.


돌강과 더불어 주빙하기후 환경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지형이 한가지 더 있다. ‘애추’가 바로 그것. 애추는 일본식 한자어이므로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너덜지대’ 또는 ‘너덜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너덜지대는 우리나라 산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지형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너덜지대는 경남 밀양 천황산에 있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맺히는 얼음골로 유명하다. 얼음골은 이런 너덜지대에서만 발달하고 있어 흥미롭다. 충북 제원군 금수산의 얼음골, 경북 청송의 얼음골 등지도 모두 너덜지대다.


돌강과 너덜지대는 외형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돌이 이동한 방식에 차이가 있다. 지표에 노출된 거대한 절벽 모양의 바위에 절리가 형성되면 그 사이로 수분이 스며든다. 이 수분이 얼어 절리 사이가 점점 벌어지면 절리를 경계로 각진 바위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이 바위들이 아래로 굴러 떨어져 쌓인 것이 너덜지대다. 너덜지대가 만들어진 이런 과정을 ‘암석낙하’(rock fall)라고 하며, 돌강을 만들어낸 솔리플럭션 방식과는 다르다(그림 3). 




(그림3)너덜지대가 생기는 과정


너덜지대의 돌은 돌강에 비해 비교적 작다. 비슬산 돌강을 이루고 있는 돌은 길이가 보통 1m 이상이며 10여m가 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너덜지대의 돌은 크기가 주로 1m 이하인 것이 대부분이다. 돌강의 돌은 고온다습한 땅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로 둥근 형태다. 이에 비해 너덜지대의 경우 지면에 노출돼 있던 돌에 한랭건조한 상태에서 수분이 스며들어가 언 다음 부서졌기 때문에 각져 있다. 즉 어떤 기후조건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돌의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또한 돌강은 경사가 15° 내외로 완만한 반면, 너덜지대는 약 30° 정도로 급한 경사를 보인다.돌강은 마지막 빙하기 동안 한반도가 주빙하기후 환경에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지형이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과학동아 2003년 9월호>


만어사 전설


만어산 암괴류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따르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가다가 걸음을 멈추는 곳이 인연이 있는 곳이라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은 물고기가 뒤를 따랐는데 왕자가 머물러 쉰 곳이 바로 이곳 만어산에 있는 만어사라고 한다. 그 뒤 왕자는 커다란 미륵돌로 바뀌었고, 물고기들은 크고 작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암괴류 뒤쪽에 자리한 만어사는 가락국 김수로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아주 오래된 사찰이다.

옛날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이라는 곳 곁에 가라국(呵囉國, 가락국)이 있었다. 하늘에서 바닷가로 내려온 알에서 나와 이 나라를 다스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그때 나라 안에 옥지(玉池)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 속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살던 다섯 나찰녀(羅刹女)들이 이 독룡과 왕래하며 교접한 까닭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익지 않았다. 수로왕은 주문으로 그들이 왕래를 하지 못하게 하려 했지만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로왕이 부처를 청해 설법을 하게 하니, 나찰녀들이 오계(五戒)를 받았고, 그 이후에는 재앙이 사라졌다. 이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골짜기 속의 돌로 변하였는데, 그 돌에서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 이곳에 만어사를 지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이 설화는 『고기(古記)』에 전하고 있는 것을 일연(一然)이 옮겨 실은 것이다. 일연은 이를 믿을 만한 것이라 하면서, 『관불삼매경(觀佛三昧海經)』(실제 문헌은 『불설관불삼매해경(佛說觀佛三昧海經)』) 제7권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고기』의 기록보다 더 상세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경전 속에 등장하는 나건가라국(那乾訶羅國)의 독룡과 나찰의 사귐을 왕이 석가모니를 청해 진압했다는 사건이 후에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이야기로 변이된 것이다. 불교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형성된 만어사 창건설화는 ‘너덜지대’로 알려진 만어사 주변의 수많은 돌들을 증거물로 삼아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만어산 경석(萬魚山磬石)’이라 하여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했다고 세상에 전한다고 했고, 세종 때에 이를 채굴하여 악기를 만들었지만 음률이 맞지 않아서 폐지하였다고도 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전하는 설화를 보면, 경전의 불교적 색채가 많이 탈색되어 나타난다. 가락국 수로왕의 꿈속에서 동해 용왕이 도사의 법문을 듣고 좋아서, 아들과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을 함께 보내 법문을 배워 오게 한다. 그들은 만어사가 있는 자성산에 왔다가 해일로 돌아가지 못한다. 용왕의 아들은 미륵돌이 되고, 물고기 일만 마리는 모두 너덜겅이 된다. 이 꿈을 꾸고 난 수로왕이 그곳을 찾게 되어 만어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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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 만어사 너덜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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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오라

Posted by 지오VR
2015.08.23 18:23 세계지리답사/그리스

메테오라(Meteora) 사진을 클릭하시면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메테오라

나에게 메테오라가 각인된 건 영화 ‘7인의 독수리(1976)’에서 바위 산 사이를 행글라이더를 독수리처럼 비행하는 모습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바위와 행글라이더가 남아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Μετέωρα [mɛtɛoɾɐ])로 ‘공중에 떠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공중에 떠다니는 바위산을 연상할 수 있겠다. 아바타의 배경은 중국의 장가계와 황산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했다고 들었다. 이 곳 메테오라는 정말 공중에 떠있을까? 구름 속의 메테오라를 상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출처 : http://www.visitmeteora.travel/en/get-inspired/four-seasons-of-meteora >



사진을 클릭하시면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바위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왜 저렇게 험한 곳에 집을 짓고 살까?’는 지리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한번쯤은 생각했을 의문이다. 


메테오라 바위들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멀리서 바라볼 때 여러 상상을 하게된다. 중국 구이린의 탑카스르트 모양, 터키의 카파도키아, 중국의 장가계...등, 막상 가까이서 보니 대한민국 진안 마이산이다. 콘크리트 덩어리다. 왠지 친근감이 생긴다. 마이산은 역암이다. 이 곳에서도 마이산 처럼 수많은 타포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엄청 규모가 크고 생김새가 다양하다

 

연구에 따르면 메테오라의 바위 봉우리는 6천만년전 신생대 제3기 팔레오세 시기에 형성된 후 풍화작용과 지진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마이산보다 동생이군..^^ 

Pindos 산맥의 동쪽 그리스 중북부, 테실리아 서쪽 지역은 사암의 융기와 사암과 역암의 혼합물로 구성된 암석으로 6천만년 전에 형성되었다. 지각 운동은 해저면을 상승시켜 고원을 형성시켰으며 두꺼운 사암층에 많은 단층선을 만들었다. 지속적인 물과 바람에 의한 풍화와 극단적인 온도는 거대한 바위 기둥을 만들었고 선사시대의 해수면을 나타내는 층이 표시되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테실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곳이 예전에 바다였었다고 믿으며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정확하다면, 마지막 빙하기 침수기 약 기원전 8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메테오라의 바위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글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독일의 지질학자  Philipson 이론에 의하면...원문은 아래 (누가 쉽게 해석해주실래요.)

The prevailing theory about Meteora creation, is that one of the German geologist Philipson, who came to Greece in the late 19th century. According to his theory, a large river had his estuary in this area which for million of years was covered by a narrow and deep part of the sea .The river waters place matter, stones and generally several materials that were transferred by its waters at the estuary from Northern parts of primordial central Europe. From the accumulation of these materials deltaic cones were formed.


25-30 million years ago, after some geological changes took place during the centuries, the central part of today’s Europe was lifted. That’s how the opening of Tempi was created ,having as a result the pouring of the waters in today’s Aegean sea.


During the tertiary period ,at the time of the alpine orogenies, the solid volumes of the “rocks” were cut off from the mountain chain of Pindos that was created and as the centuries went by, the plain of Pinios river was formed between them.


With the continuous corrosion by the wind and the rain as well as by other geological changes, these rocks took their present form through the passing of million of years.


* 테실리아 평야 : 트리칼라와 라리사 저지가 중앙에 평원을 이루며, 주변으로 산맥이 감싸돌고 있다. 이 곳에는 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심한데, 여름에는 비가 많아 토지를 비옥하게 한다. 그리하여 테살리아는 "그리스의 곡창"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먼 옛날 이 평야지역은 내해였다. 페레우스 강(살람브리아 강)이 템페 계곡을 뚫고 길을 내면서 테살리아 호수의 물이 살로니키 만으로 빠져나가 면서 마른 땅이 되었다.(반 룬의 지리학(2011) 105쪽,도서출판 아이필드)

이 지역은 지형의 경계가 분명하다. 할시아(Chásia)와 캄부니아(Kamvounia) 산맥이 북쪽에 있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올림포스 산 고지가 북동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핀도스 산맥이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오사 산과 필리오 산이 있다. 피니오스 강의 몇몇 지류가 이 지역으로 흐른다. 


역암 


타포니


이 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메테오라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Theopetra 동굴이 있다. 테실리아 평원 북부의 칼람바카에서 가까운 동굴은 펠로폰네소스의 대학연구팀과 문화부에 의해 1987 년부터 발굴 "동굴의 주민들이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돌 벽을 구축한 것으로 나타내며, 가장 최근의 빙하기의 가장 추운 기간과 일치" 구석기 시대 이후 (55,000년 전) 지속적으로 거주했다고 알려져있다. 동굴은 폭 3m, 길이 17m, 넓이500㎡이다. 


수도사들이 바위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에 처음으로 살러 온 것은 9세기였으나, 수도원 건물이 건축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무렵에 비잔틴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적대 세력인 튀르크 족은 계속해서 수도원들을 공격해 왔다. 고립되어 있고 안전한 곳을 찾아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칼람바카 근처의 바위산에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의 수는 점차 늘어났고, 이곳은 '메갈로 메테오로', 즉 '거대한 메테오로'라 불리며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수도원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 공동체는 스물네 채의 수도원을 포함하는 규모로 성장했는데, 로프로 된 그물을 늘어뜨리고 접을 수 있는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야 도달할 수 있다. 각각의 수도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저마다 재산과 농작물, 양이나 염소떼 등을 관리한다. 이 수도원들을 통해 그리스의 전통이 튀르크 족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로 스며들어갈 수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하에서 소멸되어 영원히 사라질 위기를 벗어나 보존될 수 있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7인의 독수리(1976)

 

 

메테오라 위치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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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헤파이스토스 신전

Posted by 지오VR
2015.08.23 03:53 세계지리답사/그리스


헤파이스토스 신전(Hephaistos) - 사진을 클릭하면 360도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일정에 없던 아고라를 가기위해 일행과 떨어졌다.

아고라 입구 매표소, 아크로폴리스 표가 있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어제 갔었는데 현재 갖고 있지 않다고 하니 4유로 내라 한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자세히 천천히 느끼며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먼저 아그리파 음악당으로 갔다. 음악당 입구에 세 개 조각상만이 남아있다. 한컷 찍고... 멀리서 보아도 잘생긴 신전 하나가 보인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다.


언덕으로 나 있는 길을 올라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신전으로 갔다. 이 신전은 다른 건축물들과 달리 고대 그리스 시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전적이며 웅장하다. 헤파이스토스는 장인(匠人)의 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 산업과 제철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신전은 기원전 449년에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고, 420년에 건축이 재개되었다. 도리아식의 기둥이 가로 6개, 세로 13개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의 지성소에는 헤파이스토스 신상이 모셔져 있다. 이 신전은 헤파이스토스 신전 외에 테세이오(Theseio)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신전 장식에 헤라클레스와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의 업적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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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 그리고 올리브밭과 수로

Posted by 지오VR
2015.08.22 14:17 세계지리답사/그리스


구글어스를 통해 본 촬영지점  ( 사진을 클릭하면 360도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오니아 해와 이테아 그리고 올리브밭과 수로 ( 사진을 클릭하면 360도 vr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델피 그리고 올리브 밭과 수로

그리스에 왔으니 델피에 가서 신탁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델피에 도착했다. 그러나 신탁을 받지 못했다. 무거운 삼각대를 들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델피 유적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이렇게 떠들어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있는 유적지 감시원중 한명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어쩌구 저쩌구... 멀리서 그리스어(영어였나?)로 하는 말이었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삼각대를 사용할 수 없다...... 아직 삼각대를 펼쳐보지도 않고 어깨에 메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아~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 알고있고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국말로 말해줬다. 많은 관광객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뭐 여러 이유가 있어 그렇겠지 이해할려고 했지만.. 쉽게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이후로 나는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나의 이런 감정은 씩씩거리고 있었고, 유적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촬영을 안할 수는 없고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고 손각대(?)로 몇 노두 촬영했다. 그러나 이 놈의 못되먹은 성격은  가장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스타디움으로 발길을 주지않고 유적지를 빠져나와버렸다. 후회되고 아쉽지만 지난 일 어찌하노... 일행보다 너무 일찍 내려왔기에 편안히(?) 나무그늘에서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델피 박물관을 둘러보고...


델피 신전을 보고 내려오는 길, 이오니아 해의 이테아(Itea,) 도시를 배경으로 어마어마한 펼쳐진 올리브 밭, 위험한 고개길이었지만 차를 세웠다. 해발 500m이상 되는 곳에 수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중해 지역의 수로에 관한 이야기는 로마의 수로를 통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 수로에 대한 생각은 왜 전혀하지 못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수로에 대한 이야기는 2007년 미케네 문명의 성채 미데아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에 이목을 끌었지만 나에게는 남의 일, 이번에야 그리스를 가면서 자료를 찾다가 알게된 사실이다. 기원전 13세기에 수로가 있었다는 것을....


현지 가이드의 말은 지금 보고있는 수로는 아테네까지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믿기 힘들었다. 결국 답사가 끝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구글어스를 통해 수로를 찾아 추적해보았다. 한참 달리던 수로가 산속으로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평야를 달리고를 여러차례 반복한 끝에 결국 목적지는 아테네, 수로가 정수시설 두 곳을 지나는 것도 확인하였다. 아테네의 식수로 사용되는 듯 하다. 상당히 높은 산인데 그걸 뚫고 지나 유유히 다른 쪽으로 빠져나온다. 아테네에 가까워 지면서 수로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역으로 추적하였다. 아테네 부근에 있는 정수장 시설을 찾고 거꾸로 추적해보니 이전의 찾은 수로와 서로 만나고 있었다. 아테네 부근의 수로는 덮개가 있었다.


아테네를 향해가는 수로


광활하게 펼쳐진 올리브밭


델피에서 아테네까지 수로를 구글어스를 통해 추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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