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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답사/전북

대장촌(大場村)과 춘포(春浦)

사진을 클릭하면 춘포(대장촌) 360VR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대장촌
(大場村)과 춘포(春浦)

대장촌’, ‘대장이란 지명이 일제의 잔재일까? 익산시 춘포면 대장촌리대장역이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1996춘포리춘포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04년 호소카와 농장,  1914년 대장역 설립 이전 이곳은 어떤 지명으로 불리었는지 자료를 찾아 실마리를 풀어보자.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대장리(大場里)

동일면에 속한 대장리< 호구총수, 전주부읍지>

 

조선 영조(1759) 때 편찬한 읍지를 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전주부읍지(全州府邑誌)와 한국고전문화연구원에서 번역한 여지도서 전주 [방리(坊里)] [서부(西府)]동일면(東一面) 관아에서 50리이다는 기록이 있다.  1789조선 각 도의 호수(戶數)와 인구수(人口數)를 수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6() 전라도 전주 동일면대장리(大場里)를 포함하여 15개리가 기록되어있다.  전주 서쪽 동일면에 대장이라는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동일면은 익산군에 속하게 된다.

 

1872년지방지도 전주지도와 익산군지도에 각 각 익산대장포(益山大場浦)’, ‘대장포(大場浦)

 

전주 지도에 동일면(東一面)이라 쓰고 초곡리, 신흥리, 운용리, 망산리, 석불리, 신평리, 석탄리 7개리와 만경강에 익산대장포(益山大場浦)라 쓰여있다. 대장포는 만경강을 건너는 나루터 취락으로 추정된다.

익산군지도에는 춘포면, 춘포산, 회화, 고잔, 사천, 장연 지명과 강가에  大場浦水深一丈 潮生則二丈源自全州漢川기록이 있다. 대장포의 수심이 1(3m), 밀물 때는 2(6m)로 전주천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명이다. 고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대장이란 지명이 이미 조선시대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 전주, 익산대장포

 

1872년지방지도 익산군, 대장

 

189445일 레이널즈(이눌서, 李訥瑞) 선교사 대장촌에서 잤다.

 

대장교회100년사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1894년 전라도 지역 답사를 위해 만경강변 대장촌에 머물며 전도여행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장촌에 숙박시설인 '여각'이 있었고, 대장교회 예배당 터 주변에는 만경강 나루터가 있었다.

"전주에서 40리 떨어진 대장촌에서 하루 잤다. 서 씨(통역)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많은 책을 팔았고 신약성경 한 권도 팔았다'<레이놀즈의 선교 기록 중> 레이놀즈 기록 원문을 직접 확인하지 못해 아쉽다.

레이놀즈 선교사 기

 

1894820남유수록대장촌이 등장한다.

二十日陽 學汝徑歸與李朴兩人及平仲作伴由全州大壯村春浦崔監察德
卿家村前有十里荷花乃益山長淵也與主人出觀美...

20[二十日] 맑음. 이학여가 돌아가고 이()와 박() 두 사람 그리고 평중(平仲)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전주 대장촌(大壯村)을 거쳐 춘포(春浦) 최감찰(崔監察) 덕경(德卿)의 집에 이르렀다. 집 앞에 십리하화(十里荷花)가 있었는데 바로 익산의 장연(長淵)이었다. 주인과 함께 나가서 구경을 하였다. 아름답구나!

남유수록(南遊隨錄)은 부여에 살았던 사대부인 이복영이 1894년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때 피난하면서 겪었던 일과 그 뒤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대장촌(大壯村)의 한자가 다르긴 해도 춘포, 장연마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장촌(大場村)의 오류 표기인 것 같다.

남유수록의 대장촌

<출처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한국근대사료 DB>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prd_013_0030_0050#


1894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기밀전문

510 홍계훈은 친군병을 이끌고 군산을 출발하여 30리 정도 되는 임피에 이르러 야영하고 다음날 50리 되는 대장촌(大長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40리 가서 이날 저녁 전주 감영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홍계훈은 8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 군함 평원함을 이용해 제물포에서 전북 군산으로 이동했다. 홍계훈이 군산에서 전주로 이동하면서 거쳤던 마을 가운데 한 곳이 대장촌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총지휘부가 있는 삼례 대도소에서 군산진에 통문을 보내 유박미 1천 석을 즉시 전주 대장촌으로 운반하라고 하였다.“ 1984년 음력 9월 동학농민군의 총지휘부인 대도소는 삼례에 설치되었다. 총지휘소를 차린 직후 전봉준은 군량미를 즉시 대장촌으로 옮기하고 명령을 내린다. 이 상황을 당시 일본 공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대장촌(大長村)으로 한자표기가 다르긴 해도 대장촌(大場村)임을 알 수 있다.

 

1900~1902 雙江浦·大場浦(大場村) 船旅閣主人 소송문서

1901년&nbsp;전주군수(全州郡守) 전령(傳令)

傳令雙江浦大長浦來往船人等處本浦所在都旅閣主人卽京居徐晉州宅供物也...

19011124일에 전주군수(全州郡守)가 쌍강포(雙江浦)와 대장포(大長浦)를 왕래하는 뱃사람들에게 여각 세수(旅閣 收稅) 문제로 내린 전령(傳令)이다. 雙江浦大長浦는 만경강에 있는 포구인데, 연관된 다른 문서에 따르면 쌍강포는 김제군 관할이었고, 대장포는 익산군 관할이었다. 서울에 사는 '徐晉州宅'은 두 포구에 있는 旅閣에서 세금을 걷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0~1902년에 이 지역의 다른 사람과 분쟁이 발생한 바 있었다. 이 분쟁에 관련한 문서는 현재 6건이 남아 있고, 본 문서는 이 가운데 시기적으로 두 번째 문서이다.

1902년 김제군수(金堤郡守) 전령(傳令)

傳令雙江浦大場村旅閣船人等
本郡雙江大場村船旅閣主人卽京居徐晉州宅買得之供物也幾十年無弊收稅矣...

190210월에 김제군수가 쌍강포와 대장촌(大場村)을 왕래하는 뱃사람들에게 전령(傳令)이다. 이 분쟁에 관련한 문서는 현재 6건이 남아 있고, 본 문서는 이 가운데 시기적으로 여섯 번째 문서이다. 문서의 수취자는 '雙江浦大場村旅閣船人等'이다.

1914년 춘포면 대장촌리, 191411월 대장역


일본 지주들이 언제부터 조선의 토지를 매입하고 농장을 설립했나?

1899년 군산이 개항되고, 1901년 일본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일본인 지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장촌 지역은 러일전쟁 전후로 하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立)에 의하여 1904 전북 익산군(益山郡)의 춘포면(春浦面)의 대장촌(大場村)후작세천가조선농장’(侯爵細川家朝鮮農場)이 설치되면서 토지 매입이 가속도가 붙었다. 대장촌에는 구마모토 사람들이 잇달아 들어오면서 비후촌(肥後村)으로 불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비후는 구마모토의 옛 비후국을 뜻한다.

호소카와 가문은 1904년 이후 5년 동안 대장촌 중심으로 700정보(210만 평)의 땅을 사들여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대장촌의 최대 지주가 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1,400여 정보(420만 평)의 대농장을 갖게 되었다.

1912년 조선 지형도(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의 대장촌

1912년 조선지형도 익산, 만경강 직강화 공사 이전의 대장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총독부 발행 익산 지형도
(1912)를 살펴보면, 전주~이리 간 전북경편철도(1914)와 대장역 개통, 만경강 직강화 공사(1924) 이전의 대장촌 부근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자유곡류하는 만경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호소카와 농장의 설립(1904)으로 대장촌 서쪽 만경강가에 현재의 중촌·신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1924년 만경강 개수공사(직강화 공사)

1924년 만경강 개수공사 평면도(출처: 이종진, 2016,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 ᄒᆞᆫ맘)

조선총독부 만경강 개수공사 평면도에는 굴곡이 심한 만경강 유로를 직강화하면서 새로운 유로가 굴착을 되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새로운 유로가 만들어지고, 높은 제방이 들어서면서 판문마을과 회화마을 앞에는 구강(구하도)이 생겼다. 만경강 개수공사로 인해 강 건너 마을이 된 구담마을은 여전히 옛 강 흐름의 유로를 따라 행정구역의 경계를 유지하고 현재 익산시에 속한다.

 

 

1937년 발행 지형도에 대장역을 おほば(오호바)’로 표기하고 있다.

1937년 발행 지형도의 대장역 일본어 표기


일본은 쌀의 일본 반출을 위해 호남선 철도를 1911년 10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14년 1월에 완공했다. 이어 1914년 11월 전주-이리를 연결하는 전북경편철도의 개통되면서 대장역이 생겨났다.  1929920일부터 업무 개시고시 318호가 게재된 관보와 1937년 발행 익산 지형도에 대장역의 이름을 일본어 넓은 들의 뜻인 おおば(오오바)’가 아닌 おほば(오호바)’로 쓰여있다. 일본 지명, 우편주소, 지도 인터넷 검색 결과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고어사전에 '할머니', 일본어사전(goo)에서  ほば (호바)의 뜻이 포장(圃場), 농장, 작물을 키우는 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일본어 번역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농장이란 의미가 맞다면 호소카와 농장을 연상시키는 역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대장촌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부터 있었다.

고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대장포와 대장촌이란 지명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촌은 만경강 포구의 여각과 장터가 있는 나룻터 취락이었다. 1904년 호소카와 가문의 토지매입과 농장 설립과 치안, 교통(철도·도로), 통신, 학교, 의료, 종교, 관개시설 등이 1910년 전후하여 설치되고, 1915년 대장촌은 성공적인 농장마을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모범촌’으로 선정되었다. 대장촌은 일본 본토의 어느 마을과 유사한 시가지 구조를 가진 개간·간척취락으로 변했다.

대장촌은 일본인 40호, 조선인 90호가 같이 거주하는 마을로 대부분 외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었다. 조선 전통 마을의 당산나무, 효자 정려비, 사당 등은 볼 수 없고, 직선으로 뻗은 도로와 일식가옥, 일본신사, 도정공장이 이 마을의 경관이다. 전주-삼례-이리-군산을 잇는 철도와 역은 인구 집중과 마을의 확장을 가져와 1921년 면사무소 소재지가 인수리에서 대장촌리로 옮겨왔다. 대장촌이란 지명은 일본 지주의 농장마을이란 인식과 일본식 지명인 동산촌이 연상되면서 일재 잔재 청산이란 이름으로 1996년 춘포리로 변경되었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 촌(村)이 들어간 지명이 있다. 마을을 나타내는 지명 가운데 골이 들어간 지명은 6,127개로 가장 많고, 촌(村, 2,701개), 말(2,049개), 곡(谷, 1,599개), 마을(487개), 뜸(146개) 등이 들어간 순이다. 촌이 들어간 마을로는 ‘신촌’(新村)’ 263개로 가장 많으며, ‘평촌’(坪村, 138개) 이다.

한국땅이름큰사전(한글학회)에 대장이 들어간 지명으로 대장, 대장골, 대장동, 대장리, 대장터등이 있다. 대장촌리는 본래 옥야현의 지역인데, 고려 때 완산부에 편입되고, 조선 조 때 전주부 동일면이 되었다가, 고종 3년(1899) 익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월리, 고잔리, 신평리, 신룡리, 간리 일부와 춘포면의 회화리 일부와 김제군 회포면의 유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장촌리라 해서 익산면(이리시)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춘포면에 편입됨. 이라 쓰여 있다.

지명의 일재 잔재 처리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민족 감정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언어와 문자 그리고 지형과 지도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언어학자와 지리학자가 참여하여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본래 우리 것을 남의 것으로 둔갑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8년과 2023년 대장촌 항공사진 비교

 

춘포(春浦)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춘포 관련자료를 찾아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산천, 춘포


조선 명종
(明宗) 신증동국여지승람(1546~1567) 33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익산군(益山郡) 산천山川) 춘포(春浦)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화산(龍華山)에서 나와 전주의 신창진(新倉津)으로 들어간다. 라는 기록으로 춘포 지명이 나타난다.

 

*여지도서(1757(영조 33)1765) 익산군읍지 전주 진관 익산(益山) 방리(坊里)군내면(현재 금마면), 제석면, 율촌면, 지석면, 용제면, 춘포면, 두촌면, 두천면, 구문천면, 미륵면 (10개면) 춘포면 관아에서 남쪽으로 20리이며,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513호이다. 남자는 980명이며,여자는 133명이다. 산천山川)춘포(春浦) 관아의 남쪽 15리에 있다.한 물줄기는 도순산에서 흘러나오고,한 물줄기는 용화산에서 흘러나오며, 한 물줄기는 미륵산에서 흘러나온다.

호구총수 춘포면


*
호구총수(1789) 6() 익산 춘포면 입석리, 쌍정리, 반도리, 상리, 불당리, 신평지, 문종리, 장연리, 사천리, 고잔리, 판문리, 포변리, 신덕리, 회화리. 덕실리, 신월리, 자전리, 삼포리 등 18개리를 관할하는 것으로 쓰여 있다. 대부분 오늘날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는 지명들이다. 회화 마을은 현재 춘포리에 위치한다. 호구총수 회화리(會花里)와 1872년 지방지도 회화리(回化里)는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전주 동일면에 대장리, 춘포면에 회화리가 속해 있었다. 

1872년 지방지도 춘포면

 

*1872년 지방지도 익산
춘포면 입석리, 쌍정리, 반도리, 상리, 불당리, 문종리, 장연리, 사천리, 고잔리, 신덕리, 회화리. 덕실리, 자전리, 삼포리, 지경리, 월포리 등 16개리가 표기되어 있으며, 回化場市自官30, 大場浦水深一丈 潮生則二丈源自全州漢川, 紫田店幕自官二十五里, 회화리는 마을 지명과 함께 시장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대장리 지명은 보이지 않고 대장포(포구)로 기록하고 있다.

김정호의 청구도 춘포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춘포(春浦) 남쪽으로 처음이 20, 끝이 30리이다. 교량입석교(立石橋) 춘포(春浦)와 김제(金提) 길에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는 김정호가 1861년에서 1866 사이에 제작, 편찬한 조선의 지리지로. 3015책이다.

*전익수리조합(1910)은 익산군 춘포면(사천리,장연리,판문리,신호리,회화리,덕실리,시전리,불당리) 동일면(대장촌, 신월리, 신평리, 구담리, 구복리, 간리)을 관할하였다.

*한국땅이름큰사전(1991, 한글학회)
춘포면 익산군 1, 14면의 하나. 본래 익산군의 지역으로서 춘포(전북-익산)의 이름을 따서 춘포면이라 하여, 시전, 신동, 덕실, 회화, 신호, 판문, 사천, 장연, 궁월, 화평, 반도, 문종, 삼포, 입석, 쌍정의 15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 군면 폐합에 따라 두촌면의 엽동, 갈전, 창평, 금죽, 수양, 평영, 삼리, 학동, 안천, 상다. 하다, 신기, 신동, 노적, 원정, 심암, 내동, 문덕, 오산, 광동의 19개 동리와 두천면의 덕성리 일부와 전주군 우서면의 해전, 신기, 신평, 중신, 쌍북 5개리의 각 일부와 김제군 회포면의 신기, 신덕 2개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춘포면 이라 하여 창평, 천동, 천서, 신동, 오산, 덕실, 용연, 인수, 삼포, 쌍정의 10개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17에 익산면(이리시)대장촌, 석탄의 2개를 편입하여 12개리가 됨. 동쪽은 왕궁면과 완주군 삼례읍, 남쪽은 만경강 건너 김제군 백구면, 서쪽은 이리시, 북쪽은 팔봉면에 닿음.

 

대장촌과 춘포는 별개의 지명이었다.

1789년 전주 동일면 대장리(大場里)는 대장포, 대장촌등으로 불리다가 1917년에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리가 되었다. 현재는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이다. 자료를 정리하면 대장촌은 대장리, 대장포, 대장촌 등으로 불리었으며, 전주와 익산, 익산과 김제의 경계 지역으로 여각과 장이 서는 만경강의 나루터 취락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전라도 전주 동일면 대장리(大場里), 1872년지방지도 전주와 익산지도에 대장포라 쓰여있으며, 1894년 레이놀즈 선교사 기록, 남유수록, 일본의 기밀문서, 1900,1902년 소송문서에 대장포()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1906년 전주군 동일면이 익산군에 편입되면서 익산군 동일면 대장촌리가 되었다. 1914년 익산군 춘포면과 두촌면을 병합하여 익산군 춘포면이 되고 1917년에는 익산면으로부터 대장촌리와 석탄리가 춘포면으로 편입되어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리가 되었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으로 익산시 춘포면 대장촌리, 199611 익산시 춘포면 대장촌리(大場村里)익산시 춘포면 춘포리로 변경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1900~1902雙江浦·大場浦(大場村) 船旅閣主人 소송문서.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0, 2021,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1,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농촌 수탈의 痕跡.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한국근대사료 DB
손길신, 2022, 철도역사 이야기 제90, 매일건설신문.
윤춘호, 2017, 봉인된 역사 대장촌의 일본인 지주와 조선 농민, 푸른길.
한글학회, 1891, 한국땅이름큰사전.
국토정보플랫폼, 1948, 2023년 항공사진.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 신증동국여지승람, 호구총수, 1871지방지도, 여지도서, 청구도.
조선총독부, 소화 12(1937), 고산, 이리 도엽, 국토정보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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