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Posted by 지오VR
2017.04.23 16:02 한국지리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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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두무진, 사곶 천연 비행장, 남포리 콩돌해안, 진촌리 감람석 포획 현무암 등 특이한 지형과 지질 현상이 나타난다.

고구려 때는 섬 모양이 고니 또는 고니가 많아서 곡도(鵠島)라 했다한다. 이후 고려 시대에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펴고 나는 형상과 같다 하여 백령도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려 초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 후기까지 백령수군진을 있었던 현재의 백령면사무소가 있는 부근은 진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심청전의 인당수가 두무진과 장산곶 사이에 있고, 연꽃이 떠내려왔다는 연화리 등을 바탕으로 심청전의 무대라고 홍보하고 심청각을 세워 관광지로 이용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전파 산실 자생교회인 중화동 교회가 있고 한반도 유일한 물범 서식지가 있는 곳이 백령도이다.


사곶 천연 비행장

<1960년대>


길이 약 3km, 폭 약 300m의 사곶 해안, 규암이 오랫동안 해수에 침식되어 만들어진 고운 입자의 모래가 파도 에너지가 약한 만에 쌓여 형성된 것이다.

규암 직경이 0.3mm에도 못미치는 가는 모래는 석영이 주성분으로 바닷물을 머금으면 단단해져 대형 버스도 해변을 다닐 수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비상 활주로로 이용하기도 했다한다. 70년대 콘크리트 장벽 설치, 90년대에 간척공사로 인해 바닷물의 흐름이 변해 점토질 퇴적물이 바다로 쓸려나가지 못하고 사곶해안으로 몰려들어 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콩돌 해안

<콩돌해안 범(BERM)>


백령도를 이루는 암석의 3분의 2는 사암이 변성되어 만들어진 규암과 변성셰일이다. 규암은 대부분 석영으로 이루어저 화학적 풍화에 강해 자갈로 남기가 쉽다.

단층과 절리에 의한 파쇄작용으로 부서진 규암 조각이 정육면체 또는 직육면체에 가까워 콩돌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파도에 의해 계속적인 왕복운동을 하면서 자갈들끼리 서로 부딪치며 마모돼 매끈한 자갈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콩돌로 만들어지기까지는 해수면 상승시기부터 지금까지 약 1만8000년 정도의 세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길이 약 1500m, 폭 약 50m.

콩돌이 쌓여 있는 해안은 몇 개의 계단상의 둔덕을 이룬다. 이것을 지형학 용어로 범(berm)이라고 하며, 대개 해안선과 평행하게 발달해 있다.이는 해양 조건과 기상 조건에 따라 에너지의 세기가 달라지는 파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감람석 포획 현무암

<감람석 포획 현무암>


백령도에서도 화산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진촌리 북동쪽에 위치한 하늬바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가운데 황록색 암석이 박힌 암석이 있다. 감람석 포획 현무암이다.

약 460만 년 전 지하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면서 지하 42~63km에 있던 맨틀 구성 물질 가운데 하나인 감람석을 붙잡아 지표로 나와 굳은 암석이다.

백령도 현무암은 진촌리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분포한다. 정확한 위치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도가 높은 진촌리 성당부근이 화산 분출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람석은 맨틀을 구성하는 물질로 지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1500도의 고열에서도 잘 녹지 않는다. 맨틀에 대한 정보와 지질학 연구에 도움을 주기때문에 잘 보존해야 할 자연유산이다.


두무진


두무진은 원생대에 속하는 약 10억 년 전, 해빈 환경에서 오랜 세월 퇴적된 사암이 지하 깊은 곳에서 고열과 고압에 의해 변성된 규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화석이 산출되지 않아 그 생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근의 소청도 연구결과로 미루어 10억년 이상의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가장 밑에 있는 중화동층은 수심이 비교적 깊은 대륙붕의 펄이 쌓인 이암이고, 그 위엔 얕은 대륙붕에서 사암과 이암이 교대로 쌓인 장촌층이 있다. 두무진층은 조간대의 사암이 쌓인 가장 위층이다.


지하 깊은 곳에 있던 두무진 지층은 이후 지속적으로 지반이 상승하면서 파도와 비바람에 의해 집중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깍여 나갔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육중한 기암의 형태로 점차 육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백령도는 최후 빙기였던 약 1만 8000년 전 웅진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으로 현재의 해수면을 유지하게 된 약 6000년 전, 저지대는 바다가 되고 잔구의 상층부만 남아 섬이 되었다.


두무진의 규암층은 층리의 발달 형태로 보아, 퇴적 후 단층 작용 이외의 심한 변형 작용을 받지 않았다.

하부의 퇴적물은 먼 바다에서, 상부의 모래층은 해빈 환경에서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연흔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수의 영향도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퇴적층에 4.5~5m 간격으로 다른 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주기적인 해수변동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짙은 색의 층은 물이 차오르는 습한 환경에서, 옅은 색의 지층은 물이 빠진 건조한 환경에서 퇴적되었을 것이다. 

또한 하부의 모래층보다 상부의 모래층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것은 해안선이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물러나는 해퇴 환경에서 퇴적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점박이물범


물범은 북위 45도 이북의 북극권에 사는 국제적 희귀종이다. 전 세계적으로 300만 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백령도의 물범은 북위 45도 이남에서 서식하고 있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야생동물로 지정돼있지만 여러 위협에 놓여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하늬바다 앞 물범바위, 연봉바위, 두무진 앞 물범바위 등 세곳에 주로 살고 있다.겨울엔 이동했다가 봄에 돌아와 가을까지 산다고 한다.


중화동 교회


백령도는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이다. 이 마을 이름은 옛날 중국 배들이 우리나라를 오갈 때 이곳에 기항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고 며칠 씩 묶어갔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는 1884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 교회이다. 뒤이어 1898년 10월 9일 백령도의 중화동 한문서당에서 백령도진의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을 비롯한 몇 사람이 예배들 드리고 중화동 교회를 세웠다. 소래교회와 중화동 교회가 주목 받는 것은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한국인들 스스로가 세운 자생 교회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한국 지형 산책, 푸른숲, 이우평

우리땅 과학답사기, 살림, 손영운

한반도 자연사 기행,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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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도 옥죽동 해안사구

Posted by 지오VR
2017.04.22 16:22 한국지리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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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죽동 해안사구

가로 1km, 세로 500m 규모로 검은낭큰산(206m) 북쪽 산등성이의 80m까지 뒤덮고 있다.

대청도는 원생대 12억~10억 년 전에 형성된 변성 퇴적암인 규암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규암이 지표에 노출된 후, 바닷물에 의한 오랜 침식과 풍화로 모래가 된 것이다.

대청도 해안은 전체적으로 암석해안인데, 

곶과 곶사이 만에는 모래가 쌓여 옥죽동해수욕장, 농여해수욕장등 여러개의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해수욕장의 모래가 바람을 타고 산등성이까지 이동해 쌓인 것으로

북서풍이 강한 겨울철에 성장이 두드러진다.


<농여해수욕장 고목바위(구멍바위)>


농여해안에는 습곡 작용을 받아 크게 휘어져 있는 규암층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규암이 파랑과 조류에 마식되어 모래가 생성되고 이 모래들은 다시 파도에 이끌려 해안에 공급된다.

또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해류의 흐름으로 보아 백령도 쪽에서 상당한 양의 모래가 운반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안사구는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해안 지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해안사구는 후빙기 해안수면 상승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현재의 해수면을 유지한 6000년 전 이후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리학자 서종철 교수는 우리나라의 해수면 변동 과정을 고려해 볼 때, 옥죽동 해안사구 또한 약 1000년 전에 형성된 신두리 해안사구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사구는 사방조림 사업으로 예전처럼 모래가 풍부하게 공급되지 않고 있으며 식생들이 자라나 사구의 모양도 바뀌고 있다.


대청도는 동백나무 북한계선에 해당한다.

사탄해수욕장에서 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에 동백나무 60여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백령도에도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어 북한계선이 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청도의 역사적 기록은 <고려사>와 <택리지>에 나온다.


<고려사> 1280년 충렬왕2년 원나라 황제의 아들 애아적이, 1324년(충숙왕 2년)에는 패자태자가 대청도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330년(충혜왕 1년) 원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가 태자 시절, 11세의 나이에 계모의 계략으로 대청도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청도에는 순제가 태자 시절 600여명의 식솔과 함께 처음 대청도에 발을 내린 곳이라는 옥자포(지금의 옥죽동), 대청초등학교 자리가 당시 궁궐터였다고 하며,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는 모두 중국기와라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 황해도편에는 "황해도 장연 남쪽 바다 복판에 대청, 소청 두 섬이 있는데, 그 둘레가 꽤 넓다. 원나라 문종이 순제를 대청도에 귀양 보낸 일이 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 부처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해가 돋을 때마다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를 기도했는데, 얼마뒤 돌아가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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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 2017.05.18 14:11 신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저는 지구과학수업을 하는데 지리는 도통 약해서 ... VR로 수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멋진자료 감사합니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

Posted by 지오VR
2017.04.06 20:26 한국지리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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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를 지나면서 지방 도시의 중심이 산성 밑 도는 완전 평지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르면 일반화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배산임수의 입지가 많지 않았으며, 특히 풍수는 지방 도시 입지의 중요한 논리가 되지 않았다.

 

1360년대부터 경상도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성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해자가 갖추어지지 못해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방어하기 어려운 평지 또는 평지+산지에 걸친 '한국적' 읍성이 자발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후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왜적과 홍건적의 침입에 대한 산성방어론과 읍성방어론이 논쟁을 겪다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때부터  읍성방어론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때부터 그동안 고을의 중심지 또는 중심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던 산성은 고적으로 취급되기 시작하며, 국가가 적극적 관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 해안 고을을 중심으로 읍성을 대대적으로 축조한다. 이와 같은 방향 전환 속에서 국가는 조선의 지방도시인 읍치의 조영에 '조선적'인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낸다.

 

세종 때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읍성의 위치 선정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였는데, 중앙에서 전문가가 직접 파견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읍치의 입지 선택에 가장 중요한 논리가 된 것은 한양에 적용되었던 풍수였다. 예를 들어 전라도 낙안 읍성의 경우 1424년에 처음으로 축조되는데, 입지 선택에 중앙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원래 낙안군의 중심지가 있었던 현재의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풍수적 입지에 적합한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지역으로 읍치를 옮긴다. 또한 낙안읍성의 간선도로망과 상징 경관 역시 수도인 한양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만든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가장 중요한 낙안읍성의 남문에서 시작되는 남북 도로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동서 도로와 만난 후 서쪽으로 꺾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 바라 보아야만 한양의 경복궁에 해당되는 낙안의 동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바라본 상징 경관이 하늘=산=동헌이라는 일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세종로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하늘=산=경복궁의 경관과 동일한 것이다. 나아가 주변의 산줄기 역시 풍수적으로 합당한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낙안읍성의 남북축 역시 주산-안산의 방향과 일치시키기 위해 정남이 아니라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종 이후 축조된 읍성 대부분에서 나타났으며, 읍성이 축조되지 않은 상당수 고을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출처: 한국 역사 지리, 544~545,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엮음. 이준선 외 지음>

 

 

1397년(태조 6)에 고려 후기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세종실록』에는 1424년(세종 6) 9월부터 성벽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원래의 규모보다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의 긴 장방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문은 악풍루(樂豐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鎭南樓), 서문은 악추문(樂秋門) 등으로 불렸는데 터만 남아 있을 뿐이고,
옹성은 남문터와 서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전하는 기록대로 동문터 좌우와 동북쪽·동남쪽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성벽의 둘레는 1.385㎞이다. 동문터의 남쪽 부분이 가장 잘 남았는데, 높이는 4.2m이고, 위쪽 너비와 아래쪽 너비는 각각 3∼4m, 7∼8m이다.
아래쪽에 커다란 깬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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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 채석강

Posted by 지오VR
2017.04.02 18:28 한국지리답사

<닭이봉 퇴적층, 호수 가운데 모래와 펄이 오랜 세월 한켜 한켜 쌓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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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의 '강'은 '강(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던 중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강(岡)'자는 언덕이나 산등성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변에 드러난 해안절벽을 일컫는 말이다.


중생대 백악기 말 호수에서 퇴적된 지층

채석강의 지질은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화강암과 편마암이 기저층을 이루고, 그 위는 중생대 백악기 무렵에 형성된 퇴적암이 덮여있다. 이는 과거에 이 일대가 바다나 육지의 호수였음을 뜻한다. 약 7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의 대규모 지각 변동으로 저지대를 이루는 분지가 여러 곳에 생겨났고,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오랜 세월 동안 자갈과 모래가 때로는 셰일과 진흙이 강물을 타고 내려와 여려 겹의 퇴적층이 형성되었다.


이후 신생대에 들어와 이 퇴적층은 지반의 융기로 지표에 드러나게 되었고, 제4기가 시작된 약 200만 년 전부터 수차례의 해수면 변동에 의해 깍이고 잘려나가면서 지금의 퇴적층 단면을 드러냈다. 지금도 채석강은 바다의 물결에 의해 육지쪽으로 계속 침식을 받고 있다.


격포리 일대의 퇴적 규모는 중생대 백악기의 다른 호수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호수는 길이가 대략 수십km, 폭이 수km, 최대 수심 200~300m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건조한 산지에서 공급된 많은 퇴적물을 머금고 빠르게 흘러가는 붉은 강들이 호수 주변에 여럿 분포했을 것이다.


지질 변동의 역사와 기후변화를 알 수 있는 해식 절벽

채석강의 해식 절벽에 노출된 퇴적암 층리를 보면 그것이 쌓일 당시의 호수 환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노출되어 있는 격포리 퇴적층은 하부에서 상부로 가면서 역암에서 이암으로 입자가 작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채석강 해수면 부근의 암석은 검은색의 이암과 실트암으로 되어있어 얇은 책이 연상되지만, 윗부분은 층리가 두껍게 나타나는 사암 곳곳에 앏은 역암층이 끼어 있다.


퇴적 구조상 채석강의 아래층일 것으로 보이는 봉화봉 남쪽에는 큰 바위들이 포함된 역암층이 두껍게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래로 갈수록 입자가 크고 위로 갈수록 입자가 작아지는 것이다. 이런 퇴적 구조로 볼 때 입자가 크고 불규칙한 역암층이 쌓인 환경은 수심이 깊고 경사 급한 호수 속이었으며, 층의 두께로 볼 때 그 시기는 비교적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입자가 고운 이암과 실트암이 쌓일 때는 비교적 평온한 수중삼각주 평원이었으며, 이런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았을 것이다. 

호수의 퇴적 환경을 종합해보면 하부에서 상부로 가면서 먼저 호수 가장자리의 수중 삼각주 사면과 평원에서 퇴적이 시작되었고, 이후 분지가 침강하면서 수심이 깊어져 호수 바닥에서 퇴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자연사 기행, 한겨례신문사 및 한국 지형 산책, 이우평>


<그림출처 : 한반도의 자연사 기행, 211쪽, 한겨례출판, 전승수,김승범 박사 자료>


해식절벽에 분포하고 있는 지층은 대부분 수평으로 층리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어떤 셰일층은 단층이 져 있고, 어떤 사암층은 심하게 구부러진 습곡이 발달해 있어 한 때 이곳에 지각변동도 활발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방파제 부근에서는 사암사이에 모난 돌로 이뤄진 역암층이 끼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호수 속 급경사면에 불안정하게 쌓여 있던 자갈이나 바위들이 물속에서 사태를 일으켜 모래가 쌓여 있던 더 깊은 호수 속으로 이동해 왔거나 경사 급한 호수 속의 작은 물길을 따라 실려내려 왔는 것을 보여준다.


해식동굴 VR파노라마 보기 사진클릭


해식동굴, 해식동굴은 파랑에 의해 절리를 따라 집중적인 차별침식으로 만들어졌다. 해식동굴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위쪽 지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게 되고, 위의 지층이 무너져 내리면 해식절벽이 해안에서 뒤로 후퇴하게 된다. 


동굴 바같쪽에서 바라보면 사암층 사이에 두꺼운 역암층이 약간 경사진 상태로 끼어 있는데, 호수 속 급경사면에 불안정하게 쌓여 있던 자갈이나 바위들이 물속에서 사태를 일으켜 모래가 쌓여 있던 더 깊은 호수 속으로 이동해 왔거나, 경사 급한 호수 속의 작은 물길을 따라 실려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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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역

Posted by 지오VR
2016.02.11 01:07 한국지리답사


사진클릭 (도라산 역, 360도 VR파노라마, 2007년 7월 촬영)


개성공단,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개성공단 사람들, 김진향, 내일을여는책)


오늘(2016.2.10) 정부는 개성공단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경제는 개판, 외교는 엉망, 민주주의는 후퇴, 마침내 남북관계마저 파탄.....


2007년 7월 도라산역을 갔었다.

통일을 주제로 한 캠프에서 학생들을 인솔하고 방문한 곳 중 한 곳이다.


도라산 역은 개성공단을 가는 길목에 있다.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 복원사업으로 2002년 3월에 준공하고, 관광코스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2009년 도라산역 일반관광객의 월북 시도로 2010년 6월부터 일반관광이 중지되었다가 2014년 5월 재개되었다.

지금은 일반관광은 안되고, 패키지형 안보관광만 할 수 있다. DMZ트레인이 임진강역에서 도라산까지 운행한다. 


금강산을 다녀온 후, 개성을 가기위해 들떠있었던 적이 있다. 결국 남북관계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요즘 어린학생들이 들으면 종북이라 의심하고 간첩으로 신고할 소리,

아이들은 모른다. 금강산 관광, 개성관광을...

국정원의 간첩의심 신고에 대한 보상으로 주는 손목시계는 알고있지만...ㅠ.ㅠ

TV에 간첩색출 국정원 광고까지 나오고 있으니..

분명 냉전의 시대로 돌아갔다.




개성의 주택가 모습 클릭하면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사진출처 구글어스)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구역)내에 있기 때문에 임진강역에서 출입 수속을 거쳐야 한다.

2000.9.18 경의선 복원공사 착공되었으며, 2002년 2월 12일, 철도운행이 중단된 지 52년 만에 임진강을 건너가는 특별열차가 도라산역까지 운행되었다. 이 역을 지나면 장단역, 판문역, 손하역, 봉동역을 거쳐 개성역에 도착한다.

 

2007.5.17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2007.12.11 북측 판문역까지 화물열차 운행, 개성공단까지 원료를 운반하고 완제품을 싣고 돌아왔다. 이 열차는 일주일에 한번 운행예정이었으나 2008년 12월 남북관계의 악화로 중단되었다. 현재는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까지 DMZ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2002년 2월 20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미국의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이 역을 방문, 연설하고 철도 침목에 서명하는 행사를 하여 한반도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역 구내에는 출입국관리소가 있으며, 보안 검색대, 출입국 심사대 및 세관이 있다.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으로 가는 첫번째 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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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하루되세요
    • sungeun
    • 2017.04.17 20:13 신고
    다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꼭 가보고 싶네요

엘로라 석굴 사원

Posted by 지오VR
2016.02.07 15:18 세계지리답사/인도

 

사진 클릭하시면 엘로라 석굴 사원 360도 VR파노라마 투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정을 바꿔 아우랑가바드를 가기전에 엘로라 석굴을 가기로 했다. 엘로라 석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였던 지라, 몇 번 석굴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오래만에 지식 확인 압박에서 벗어나게되니 느낌의 영혼이 마음껏 춤을 추었다.

경주 석굴암과 중국의 돈황 석굴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불교석굴로 알았던 나에게 엘로라 석굴 사원의 규모와 섬세함 모든 면에서 충격이었다.

 

데칸 고원의 현무암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려가면서 만들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카일라쉬란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의 거처로 여겨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사실 카일라쉬 산은 티벳에 있기 때문에 중부 인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크리슈나 1세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엘로라에 그 이름을 본뜬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보통 불교에서 수미산이라 부르는 산이 카일리쉬 산이라고 한다. 이 사원은 라슈뜨라꾸따 왕조의 크리슈나 1세(krishna, 757-783)에 의해 깊이 86m 너비 45m 높이 35m의 규모로 지어졌다. 150년에 걸쳐 7천여 석공들이 동원, 거대한 바위 위에서부터 아래로 쪼아내려 갔다. 제거된 돌의 무게만 20만 톤에 이른다.

 

어떤 이는 말한다. 돌을 깍아 내는 것이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라고... (설계에 의거하여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내고 현지까지 운반하여, 그것들을 조각한 뒤에 헝크러짐 없이 쌓아 올려 건물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고도의 기술과 비용이 필요) 하지만, 여기에 동원된 사람을 상상하고 싶다.

 

중국 석굴 사원의 사암, 석굴암의 화강암, 엘로라의 현무암...

 

인도에서 불교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34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석굴이 서로 고의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없이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34개의 석굴이 2킬로미터를 넘게 늘어서 있는데, 제1∼12굴이 불교 석굴, 제13∼29굴이 힌두 석굴, 제30∼34굴이 자이나 석굴로서 3종교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이들은 시대적으로는 불교 석굴이 7∼8세기, 힌두 석굴이 7∼9세기 그리고 자이나 석굴이 8∼10세기에 만들어졌다. 가장 늦은 시대의 자이나 석굴의 내부공간은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며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밀도가 높은 공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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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라두르가 요새

Posted by 지오VR
2016.01.31 19:52 세계지리답사/인도

치트라두르가 요새(Fort Chitradurga)


함피(Hampi)에 더 오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벨루르의 유적을 보기위해 하산으로 이동 중에

치트라두르가에서 만난 화강암...

굵은 바위 언덕과 요새...

이러한 암석만 보면

항상 떠오르는 곳이 있다.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눈으로만 볼 수 밖에 없었던 곳,

사진 촬영도 금지된 곳,

정신줄 놓은 곳,

 

그 곳은

동해쪽 금강산 가는 길,

해금강이라고 해야하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석호인 감호를 막 지나면

온통 바위산이 나타난다.

선녀와 나뭇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산,

구선봉이라 했던가?

금강산 1만2천봉 중 마지막 봉우리라 했던가?

바위산 사이로 난 길 양쪽으로 펼쳐진 그 모습...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았다.

잊을 수 없는 곳이다.

...........

.......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않고,바위 정상에 있는 요새에 오르고 싶어 먼저 나아갔지만,

궁전 부근에 도착해서 바위를 보니 엄청 가파르다.

현지인들은 바위에 파인 홈을 밟고 가볍게 오른다.

이 곳으로 오르면 어디로 내려오냐는 질문에 정상에서 다른 길로 내려간단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는데, 욕심을 부렸다.일단 올라본다.

하나 둘.. 오를만 하다.그런데 그것도 잠시, 아래를 내려본 순간 아찔하다.

이제 3분의1 올라왔는데, 어찌할까 망설였다.

내려가자니 위험하고 올라가자니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무섭고...진퇴양난이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결심했는데, 옆에 있던 인도인이 손으로 끽~ 한다.

언젠가 누군가 내려가다 미끄러져 죽었다는 것인지?

위험하니까 내려가지 말라는 말인지?


이런... 한참을 서있었다

.......

그 와중에도 vr촬영하고, 등뒤로 바위를 두고 한발 한발...

식은 땀나게 내려오자, 아래쪽에서 기다리던 인도인사진찍자고 한다...

 

 


↑ 사진 클릭하면 요새에 오르는 암벽을 360도 VR파노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관련자료 찾다보니

치트라두르가에 멍키의 왕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

청년 조티 라즈, 안전보조장비 없이 맨손으로 치트라두르가 요새에 있는 성벽과 바위를 오른단다.

18살 때 벽을 오르는 원숭이를 본 이후 벽오르기 연습을 해왔다는 조티 라즈,

요새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벽을 오른다고 한다. 유튜브로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이날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흔적은 우연히 촬영한 사진 속에 성벽위 하얀 자국으로 남아있다.

 

 

<사진제공 수현 샘>


치트라두르가는 비자야나가라 왕조의 영주 나야카스의 수도,

위키백과 영어 문장 해석 번역기를 돌려보니 내용이 뒤죽박죽이다.어휴....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다...


Madakari Nayaka의 통치기간 동안 치트라두르가는 하이더 알리의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바위의 구멍을 통해서 치트라두르가 요새에 들어가는 여성을 우연히 목격하고

구멍을 통해 자신의 병사를 보내는 하이더 알리의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그 구멍을 지키는 병사는 점심을 먹기위해 집에 가야만했습니다.

경비병의 아내 Obavva는 물을 구하기 위해 구멍을 지나다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적군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Obavva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Onake(곡물을 두드리는 긴 나무막대)를 들고있었습니다.

그녀는 구멍을 통해 들어오려는 하이더 알리 군인을 하나씩 하나씩 죽였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죽어갔습니다.

단기간에 병사 수백명이 들어왔고 의심의 여지없이 죽어갔습니다.


점심먹고 돌아온 그의 남편은 피뭍은 Onake를 들고 있는 그녀와 그녀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적의 수백의 시체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함께 적과 싸웁니다. 두사람에 의해 하이더 알리의 모든 군인들이 죽어갈 무렵 아내 Obavva는 죽습니다.


바위 구멍은 아직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증표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그녀의 용감한 시도가 요새를 구했지만

Madakari Nayaka이 계속되는 전투에서는 1779 년 하이더 알리의 공격을 격퇴하지 못하고 점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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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VR 파노라마 투어

Posted by 지오VR
2016.01.28 19:37 세계지리답사/인도



360도 VR 파노라마 투어... 사진을 클릭하세요

 

아잔타 석굴  

 

데칸 고원의 중심 아우랑가바드에서 북으로 약 100km, 차로 1시간 30분

일출을 차에서 맞이하며 아잔타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이동, 또 걸어서 표검사하는 곳에 도착하니 아직 개장하지 않았다.

1등 손님이다.

사진에서 본 초승달 모양의 계곡과 절벽 여기저기 구멍난 모습이 반갑다.

아침 햇살이 등뒤에서 비춘다.

석굴입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지만, 시원하게 느껴지는 발바닥의 촉감이 상쾌하다.

......


1번 석굴... 벽화..

아잔타 석굴의 명성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벽화때문이라한다. 

그 벽화를 볼 수 있는 석굴이 1,2,4,16,17번 석굴이다.

벽화를 그린 이유는 불법을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함이라 들은 것 같다.

익숙하고 친숙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연화수 보살'

일본 호류사의 금당벽화?

얼굴방향만 다르지 목걸이와 머리모양... 많이 닮았다.

고대 인도의 뛰어난 불교 미술 수준을 가늠케 하는 벽화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옷과 액세서리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 돈황 석굴과 여러 석굴을 가보았지만,

감흥이 다르다.


연화수 보살



2번 석굴...

1번 석굴에 비해 다소 작기는 하지만 조성시기는 약간 빠른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부처님의 일생을 담은 벽화와 천불화현 변화, 황금거위로 태어났던 부처의 전생 이야기,......

천정엔 원형 및 기히학적 무늬의 문양, 만다라가 그려져 있다.

 

10번 석굴

아잔타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며 1891년 발견될 때 10번 석굴이었다.

차이티야 양식이다.

석굴암 처럼 천정을 돔의 형태로 만든 석굴을 말한다.

9,10,19,26,29번 석굴이 이에 해당한다.

불교의 석굴사원은, 예배의 장소로 하는 차이티야(Chaitya)굴)과 승려들이 사는 비하라굴로 분류된다.

39개의 팔각형 석주와 좌우 벽에는 벽화가 훼손된 채 그려져 있다.

 

10번 석굴 돔형 천정


17번 석굴

서기 450년대에 조성된 석굴, 아잔타 석굴 벽화의 백미, 최상의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8개의 부처 전생담과 자타카와 부처님 당대의 사건 등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벽화 석굴

 

 

석가모니 사촌동생인 데바닷타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아잣타사트루왕과 공모하여 술취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시해하려고 했던 사건이 묘사되어있다. 

 

 

19번 석굴

대승불교 시대 차이티야 양식, 줄무늬 돔과 각양각색의 조각상

 

26번 석굴

아잔타 석굴에 유일하게 석가모니 열반상이 있다.

입구로 들어와 왼쪽 벽면 기둥 뒤로 머리를 입구쪽으로 다리를 내부쪽으로 누워있다.

가운데는 스투파와 불상이 같이 조각된 아잔타에서는 가장 후대에 조각 양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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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시기리야 록

Posted by 지오VR
2016.01.25 01:45 세계지리답사/스리랑카



시기리야 록 사진클릭 360도 VR파노라마 감상(10개)하세요


시기리야는 사자의 언덕, 혹은 사자의 목구멍이란 의미입니다.

사자의 언덕은 인도어에서 전래된 말로 '싱하' 사자와 '기리아' 언덕의 합성어입니다.

사자의 목구멍은 스리랑카 싱할리어에서 유래된 말로 사자를 뜻하는 '싱하'와 목구멍을 뜻하는 '기리'의 합성어 입니다.

정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바위는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Sigiriya 전설

서기 5세기경 스리랑카는 '다투세나'라는 위인이 출현하여 싱할라 왕조를 계승합니다. 

그에겐 두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부인은 왕이 되기전 얻은 부인으로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었고 '카사파'왕자를 낳았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왕이 된 후 얻은 왕족 출신의 부인으로 '목갈라냐' 왕자를 얻습니다.

형'카사파'는 호전적이고 성격이 급했고, 동생 '목갈라냐'는 논리적이고 차분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다투세나왕이 노쇠해 지자 왕위 계승을 동생 '목갈라냐에게 하려고하자, 형'카사파'는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범합니다. 동생은 이 사실을 알고 바다 건너 남인도로 탈출합니다. 왕이 된 형은 심각한 정신 분열에 시달기고 불안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고, 한 시도 마음 놓고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 정신 이상자였습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을 지으려고 작심합니다.


오랜 세월 승려들의 수련장으로 쓰고 있던 정글 한가운데 바위산 위에 승려들을 쫒아내고 왕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해자를 만들고 악어를 키우고, 바위산 곳곳에 돌 기뢰를 설치하고, 수영장과 연회장을 갖춘 화려한 궁전을 세웁니다.

코끼리를 이용한 승강기를 만들고, 압력차를 이용한 대나무 파이프로 정상까지 물을 끌어 올렸다고 합니다.


어느덧 14년이 흐르고, 남인도 도망간 동생이 스리랑카로 쳐들어옵니다.

동생은 장기전을 대비해 시기리아성으로 오르는 모든 급수를 차단합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된 형 카사파는 성을 내려와 코끼리를 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지만 결국 동생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 후 아누라다푸라로 수도를 환도히키고 시기리야는 스님들의 수련장으로 돌려줍니다.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시기리아는 1898년 영국 장교에 의해 발견됩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사자의 얼굴 입구 상상도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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